사쿠라 피었던 그곳에서
문선정
내 눈물샘이 고장났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슬플 땐 당연히 울어 마땅하겠지만, 기쁠 때도 대책없이 눈물이 찔끔거려진다. 그러니까 때와 장소도 가리지 못하고 조금만 슬퍼도 찔끔거리고 조금만 기뻐도 눈물이 핑 돌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이 울었던 적이 몇 번 일까.
첫 아기를 낳고 나서 펑펑 울었었다. 막 삐지고 나온 연한 꽃잎 닮은 아기와 함께 나란히 누웠을 때, 2박 3일의 복잡했던 병원생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각지도 않던 산후 우울증이 내 예민한 감성을 뚫고 들어왔을 것이다. 정녕 아기가 미워서 울음이 터진 것은 아닐지언대, 친정엄마의 근심어려 하는 눈치도 아랑곳 않고 나는 엉엉 큰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 엄마가 되는 순간 비로소 완전한 여자가 된 기쁨을 엄숙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저 내 자유스러운 전성기를 한 순간에 몽땅 잃어버린 것만 같아 눈물을 쏟아내는 철없는 엄마가 된 신고식을 톡톡히 한바탕 울음으로 대신 했다.
그리고 일년 후 내게 하냥 느티나무의 편안한 그늘이 되어준 친정아버지의 갑작스런 영전 앞에 가족들은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때도 엄마의 두 팔에 안겨 마음놓고 울 수 있었기에 감족같이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부재만 서러워 그저 울기만 했다. 자식들의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엄마는 세상이 무너지는 두려움과 고통을 억누르며 4남매의 상처만 보듬어주는데 신경을 쓰셨던 것 같다.
그 후로 한 십 년쯤은 나는 그리 큰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드라마나 보면서 훌쩍거렸고, 남편의 서운한 한 마디에 어리광 섞인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을 때. 어머니는 그 때부터 혼자 남아 슬픔을 삭이는 것을 배웠을까.
혼자 남은 어머니는 자주 봇짐을 쌌다.
일본에 사는 큰 딸네 집으로 가는 봇짐 안엔 고추장, 떡, 김치 따위를 챙겨 메고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어머니가 생전의 마지막으로 탔던 그 비행기 안에는 아버지의 영혼이 어머니 옆에 다정하게 앉아서 갔다는 언니의 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삼 사일 사이에 급하게 여권과 비자를 만들어 그렇게 아버지의 영혼과 함께 떠난 어머니를 모시러 가야했다. 살아계신 어머니를 모시러 가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오사카 공항에서 내려 무슨 정신으로 그 먼 병원까지 찾아가 어머니의 병상 앞에 서게 됐는지...
"김상! 김상!"
가족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간호사의 소리에 퉁퉁 부어 뜨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눈꺼풀이 무겁게 꿈틀거렸다.
"엄마..."
나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마주 잡은 어머니의 손가락 힘이 내게로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이 곳을 올 때와는 다르게 불안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어머니가 떠날 리가 없지. 얼마나 강하신 분인데...
"엄마, 나 왔어. 나, 알겠어? 수술은 잘 되었대. 여기서 몸조리 잘 한 다음에 나랑 같이 집으로 가면 되는 거야...... 알았지?"
내 손과 맞잡은 어머니의 손에도 무언가 굳은 결의로 다져진 힘을 실어서 내 손에 얹어주었다.
나는 손가락을 거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하기를 약속은 깨뜨리기 위해 절차를 밟는 의식이라고 했기에, 굳이 많은 말을 해서 어머니의 기운을 빼앗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누워만 계신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병원 복도나 비상구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도를 하는 일이 전부였다.
반신불수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제발... 살아서만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자는 말을 기도문처럼 중얼거리면서 사 나흘을 보냈다. 평소 종교에 헌신하지 않아서인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절실하게 한 기도는 기대와는 다르게 비껴갔다.
수술 후 이 삼일이 지나면서 어머니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암시하는 의사들의 움직임. 말도 통하지 않는 보호자인 나를 바라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안타까운 눈빛만으로도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팔이며 다리를 꼬집어 뜯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어머니를 흔들어깨우는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감각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팔 다리를 흔들고 꼬집기를 계속하였다.
"아파? 아프냐고? 왜, 안 아파? 이렇게 세게 꼬집는데도 안 아파? 아파야지! 당연히 아파야지!"
플라스틱 파이프 같은 호흡기가 어머니의 목 깊숙이 뚫고 들어 갈 때 나는 눈을 가리면서 주저 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여년 만에 울음보가 터진 것이다.
병원 내 낯설기만 한 주변 사람들은 내가 뭐라고 떠들면서 그 많은 눈물을 쏟아내는 것인지 짐작 한다는 듯이 나를 안아주기도 하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점점 더 깊은 무의식의 상태로 빠지는 어머니를 보며 낯선 이국의 아이 같은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아야 했을 것이다.
적막을 둘러싼 절벽 위에 서있는 듯 한 아슬아슬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처음으로 나와 말이 통하는 통역사가 나를 보면서 울먹이면서 하는 말은 무서웠다. 어머니를 보낼 준비를 하란다. 처음엔 멍한 정신으로 알아듣지 못했다.
"한국으로요? 한국에 있는 병원에요?"
그게 아니란다. 아아, 지탱하던 모든 것들을 담아 둔 터질 것 같은 내 가슴을 내 스스로 쓸어내리면서 다독거려야 했다. 빈 틈을 비집고 나오는 울음을 더 세게 꾹꾹 눌러 새어나오지 않게 막아야했다. 울음으로 채워지는 내 몸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 더 더 꾹꾹 누르면 누를 수록 울음으로 채원 진 몸이 무거워 스러지기 직전의 사람은 최고로 약해 질 때 한 번 쯤 강해지기 마련인가 보다. 나는 최대한 냉정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야만 했다. 내 어머니... 내 손에서 내 눈에서 놓치기 싫은 내 어머니를 걱정없이 이쁘게 보내드리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깊은 혼수상태에서도 어머니는 자주 우신다. 그 때서야 나는 알았다.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말을 안 들어서 표현을 못 하는 것이라는 걸. 오빠도 내일이면 한국에서 온다는데... 오빠만 오면 된다. 난 그 때 울면 된다.
4월, 오사카 거리에 자박자박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랑비에 젖어 비비적거리던 사쿠라 꽃이 후줄근해진 모양새로 회색빛 보도블록 위로 한 잎 한 잎 지면서 무늬가 새겨지고 있었다. 간절하게 원했던 내 희망도 새겨진 무늬위로 얹어지고 있는 것이 퉁퉁 부어오른 눈앞에서 아롱거리었다.
그때서야 문득, 어머니께 입혀드릴 옷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타고 미나미 시장으로 가서 어머니 가시는 길에 입혀 드릴 희고 고운 명주 옷을 샀다. 최대한 예쁜 것으로...
새 옷을 사갖고 들어왔는데도 어머니는 내가 옆에만 있으면 자꾸 눈물만 흘리신다.
'미안하지. 미안해서 저렇게 계속 울기만 하는 걸 거야. 이별의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너무 빨리 내 곁을 떠나서 저렇게 계속 울기만 하는 걸 거야. 이 좋은 세상 저어버리고 가는 것이 아쉬워서 저렇게 우는 걸 거야.'
새로 산 명주 옷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계속 울기만 하는 어머니가 기어이 먼 길 떠나시려는지 시퍼런 배내똥을 기저귀 가득 쏟아내었다. 나는 꿀꺽꿀꺽 울음을 삼키면서 생수로 어머니의 온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목욕을 씻겨 드리었다. 그리고 새로 사 온 명주옷을 갈아 입혀 드렸다.
옷 탐이 많아 새 옷을 좋아하시는 나의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깨끗이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 입은 어머니는 곤히 주무시는 것 같다.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어머니는 내가 사 준 새 옷을 입고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담고 계셨다. 고와라! 어쩜 저리 고울 수가 있을까. 평소의 어머니 표정 그대로 약간 개구진 웃음을 띤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수술로 인해 없어진 머리카락도 본래의 새까맣고 숱 많은 반고슬 머리 그대로였다. 어머니의 평온한 모습을 하냥 바라보고 있을 때 어머니는 어디로 가시려는지 서두르신다.
"어디 가?"
시집을 간댄다. 내가 사 준 옷을 입고...
"그렇게 좋아?"
그렇단다. 아주 좋단다. 너무 좋단다. 나만 혼자 남겨두고 가면서 좋단다.
"누구한테 가는 거야?"
아직 모른단다. 가 봐야 안다면서... 운전수가 데려다 준다며 어머니는 택시에 올라탔다. 어머니는 뭐가 그리 좋은지 너무 좋아 싱글벙글이다.
"갈 거야? 정말 갈 거야?"
소리치는 나를 두고 어머니를 태운 택시는 급하게 떠나버렸다. 나는 꿈속에서도 택시를 탈 때 어머니의 하얗고 긴 치맛자락이 너울거리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계속 소리만 지르다 꿈에서 깨어났다.
어머니는 또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그 눈물이 흘러 귀로 들어가 먹먹할텐데 어머니는 계속 울기만 하신다.
"울지마. 걱정마. 아버지한테 가서 엄마만 행복하기만 하면 돼. 울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가란 말이야. 바보같이 나도 안 우는데. 그 대신에 오빠 올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오빠 오면 보고 가. 응? 기다려... 지금 오고 있는 중이야. 그 때까지만... 기다려... 엄마."
엄마. 엄마... 내 어머니는 몇 달 전부터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하셨다. 꼭 내게 다짐이라도 받아 놓아야 후련하신 것처럼 몇 번을 하고 또 하시는 어머니에게 나는 왜 쓸데 없는 소리를 하냐면서 면박을 주곤 했었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아파 누워있거든. 너는 나를 매일매일 깨끗하게 씻겨줘야 한다. 그래야 저승 가서도 깨끗하게 살 수가 있댄다. 알았지? 꼭 매일매일 깨끗하게 씻겨줘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운명을 지켜보는 자식은 따로 정해져 있단다. 그게 부모자식간의 인연이 확실해 다음 생에 또 만난다."
왜, 나야? 이렇게 힘든 일을...
혼자 남겨진 사람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눈 앞에 없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도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
떠나는 어머니를 아슬아슬하게 배웅하지 못 했던 오빠는 한 동안 넋을 잃고 일본의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오빠와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어머니가 묵었던 방에서 두꺼운 공책 한 권이 발견했다. 어머니의 필체로 정성스레 쓰여진 지장경이었다.
당신이 가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 자신이 선택을 했을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당신의 생년월일과 이름 밑에 行善과 善德을 비는 지장경을 3개월 동안을 빼놓지 않고 쓰여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의 날짜부터는 어머니의 이름이 쓰여져 있어야 할 곳에 언니의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오는 날 아침까지 당신 딸의 행선과 선덕을 위해 빌고 있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진 공책을 보고 나서야... 어머니가 언니의 건강을 위해 빌다가 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오사카의 화려한 사쿠라 축제를 뒤로 하고 오빠와 나는 어머니의 시신을 모시고 더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한국으로 왔다.
지금도 매화가 피는 4월이 오면 나는 내 곁에서 사라진 그리운 나의 어머니 생각으로 그윽차다.
나의 이런 안타까움이 매화나무의 꽃망울에 함께 맺혀있다 꽃이 개화할 무렵이면 고장난 내 눈물샘이 스르륵 열리면서 그리움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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