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기억의 집 - 기억의 집 이병률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 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11.02.20
[이병률]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이병률 며칠 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우는 새들의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 줄 걸 그랬나, 발이 젖어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새야 지난 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10.09.26
[이병률]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 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이병률 눈 그친 깊은 밤 산사에서였다 새는 울고 마음은 더욱 허전하여 창호 바깥의 달빛을 가늠해보다 인기척에 눈을 비볐다 옆방에 묵던 수행자가 내 방 앞에서 서서 달빛을 가로막 고 있었다 저물 무렵 마주친 앙상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림자는 먼 곳을 향해 서서 부르르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10.08.09
[이병률]찬란 - 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10.08.03
[이병률]시인은 국경에 산다 - 시인은 국경에 산다 이병률 시인의 집에 들러 저녁 때가 되었다 일 마치고 들어온 시인의 아내는 하루 종일 집에 있던 시인과 시인의 손님을 위해 밥을 지어 차려주었고 나는 밥을 먹고 일어나 시인의 방에 들어가 서성인다 무심코 책 한 권 뽑아 들었는데 책장 저 안쪽에 보이는 반 병의 말간 소주병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10.08.03
[이병률]인기척 - 인기척 이병률 한 오만 년쯤 걸어 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다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테냐 그렇게 살다..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10.07.31
[이병률]노랑 노랑은 외로운 색이다. 자칫 노랑으로부터 광기나 희망을 잃었다 해도 그건 잠깐일 뿐이다. 노랑은 착란의 색이기 때문이다. 노랑은 고독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색이며, 그러므로 철저히 외로운 색이다. 그렇다고 노랑을 부정적으로만 내몰고 싶지 않다. 황폐해져가는 세계를 참을 수 없어 하는 우..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09.02.20
[이병률]외면 - 외면 받을 돈이 있다는 친구를 따라 기차를 탔다 눈이 내려 철길은 지워지고 없었다 친구가 순댓국집으로 들어간 사이 나는 밖에서 눈을 맞았다 무슨 돈이기에 문산까지 받으러 와야 했냐고 묻 는 것도 잊었다 친구는 돈이 없다는 사람에게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았다 소주나 한잔하고 가자며 친구는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07.04.13
[이병률]바람의 사생활 -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07.04.12
[이병률]고양이 감정의 쓸모 1 조금만 천천히 늙어가자 하였잖아요 그러기 위해 발걸 음도 늦추자 하였어요 허나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질 않아 등뼈에는 흰 꽃을 피워야 하고 지고 마는 그 흰 꽃을 지켜 보야야 하는 무렵도 와요 다음번엔 태어나도 먼지를 좀 덜 일으키자 해요 모든 것을 넓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 이에요 한번 스.. 詩 읽는 기쁨/이병률 2007.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