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항아리.../시시한 수필 -

[문선정]존재의 가벼움

문선정 2008. 12. 18. 22:41

 존재의 가벼움



문선정




서울대병원 본관 정문을 들어서면 그윽한 헤즐럿 커피향이 먼저 반긴다.

병원 측에서 본관 건물 입구를 원두커피 상점을 들인 것은 어쩌면 병원을 찾는 이들에게 안도감이 들게 하려는 

배려 차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씩 스친다. 

때문인지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도 그렇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도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도 모두 그윽하게 보여 따스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건 순전히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우습지만, 나는 한 달에 한 번 병원을 찾으며 이 커피향을 맡는 일이 꽤나 낭만적으로까지 생각 한다.

커피향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들이 그리 처량맞거나 찌들어보이지 않는 느낌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까...

나는 이 곳에서 한 번도 커피를 사 마신 일은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참 다행이다!

소독약 냄새나 지린내가 나는 것보다야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커피향이 싫지가 않다고...

 

그리고 이 곳엔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으며 내 앞 날의 희망을 실어 주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또 이 곳에 올 때마다 내 몸을 떠도는 나쁜 피를 4CC 빼내는 일은 어찌보면 시원스러운 일이기에 채혈 또한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내 주치의이신 박00 교수님은,

진찰 시간 두 시간 전에 뽑은 4CC의 혈액을 참고로 하여 내 세포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왕이면 아주 세심하고 자상한 관찰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언제라도 그에게 순종할 수 있는 자세로 그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거듭 말 하지만, 그는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내 앞 날의 희망을 주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싶기에…….

"좀 어떠세요?"

"매일 똑같아요. 언제 쯤이면 이런 증상이 가라앉아요?"

"약을 끊으면 곧바로 괜찮아 져. 걱정 말고... 이것 말고 불편한 건 없지?"

"네... 그럼 언제까지 이 약을 먹어야 해요?"

"쭈욱~ 먹어야 해. 백혈구 수치는 모두 정상이고... 음... 좋아좋아!"

" ... "

" 자! 또 한 달 있다가 또 보자구요"

"고맙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까딱 인사를 하고 그의 방에서 나오는 것이 정해진 아주 단순한 대화이며 순서이다.

꼬박 한 달을 기다리다 그와 마주하는 시간은 길어야 고작 2분 가량인 것을…….

무인 수납기가 뱉어내는 30일치의 희망이라는 약 처방전을 받아 들고 나오는 날은 그래도 기분이 꽤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오늘 같은 날이다.

 

채혈을 하기 위해 아침도 거르고 11시에 집을 나왔다.

3시 30분에 정해진 내 순서대로 진료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의 바쁜 일정으로 인하여 진료실을 비우는 날이 종종 있었기에

오늘도 조금 불안해 하기는 했지만, 그는 환자에게 책임감 있게 충실해. 있을 거야… 라는 기대를 갖고 진찰실로 갔지만

불길한 예감대로 그는 또 진찰실을 비우고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오늘따라 비좁은 진찰실에 갇혀 쉬지 않고 환자를 상대하는 그가 조금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크리스마스 시기에 걸맞는 조그만 컵화분을 사 들고 진찰실 앞에 앉아 있었다.

세시 삼십분...이 지나고,

네 시가 지나고, 

네 시 삼십분이 지나고, 다섯시가 넘었다.

나를 포함한 열 댓명의 환자들도 그에게 한 달치의 희망처방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분명하다.

자그마한 컵에 들어 앉아있는 푸르고 싱싱한 싱고니움을 만지작거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즈음에,

담당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에게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교수님 퇴근했어… "

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가 났다.

이렇게 쉽게 내 존재감이 사라지는 느낌… 나는 이렇게 가벼운 존재였구나…

무슨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믿고 진찰을 받으러 오는 환자들에게 어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담당간호사는 열 댓 명이 되는 우리를 다른 진찰실로 데리고 간다.

간호사의 뒤를 따라 줄을 지어 가는 환자들은 부모 잃은 강아지 꼴이 되어 처음 가보는 진찰실로 끌려가는 듯 했다.

우리는 힘이 없다.

나는 힘이 없단 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질 힘도 없고,

그렇다고 하루를 꼬박 기다려 처방전을 받아들고 나와야 하는 힘없는 우리는 그나마 담당 감호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처음 보는 젊은 의사가 있는 진찰실로 순서대로 들어 간다.

"어떠세요?"

" ... "

"전처럼 한 달치 약 처방해 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야겠죠."

"그럼, 1월 15일로 예약해 드릴게요."

"네!"

처음 보는 젊은 의사와 주고 받는 대화의 시간이 한 30초가량이나 걸렸을까...

특진비 2천 8백원을 환불 받고, 이번 달 처방전을 받아들고 약국으로 가기 위해 헤즐럿 커피향이 넘치는 병원 정문을 열고 나오니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아... 참 기분이 그렇다!

병원 관계자 누구에게라도 화를 내야 하는데…

열 한시에 나와서 의사를 기다리다 벌써 어두워졌다니…

어떻게 특진료를 예약한 자기의 환자를 놔두고 아무런 말도 없이 의사가 퇴근을 할 수 있느냐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따지고라도 싶은데…

나에겐 그런 용기가 없다. 용기가… 없다.

어둔 병원 길을 터벅터벅 내려와 약국으로 가면서도 나를 관찰해 주지 않고 그냥 퇴근해버린 그 의사에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왜, 나는 이렇게 병에 걸렸으며, 한마디도 따지지 못하는 바보스러움에 화가 치밀어오르는 거였다.

그래,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래도 너무 하지만 화내지 말자… 화내지 말자…

약국에 처방전을 내고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중에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고 지불되어질 약값이 평소의 3배나 많게 나오는 이런 엉뚱함은 또 뭐람...?

후…

"어? 약 값이... 68만원이요? 이번엔 왜 이렇게 많이 나와요?

처방전에 적혀있는 대로 약 값 산출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단다.

빨리 병원으로 가서 처방전을 다시 받아갖고 오란다.

"병원 업무 끝났을 텐데요... 지금 6시가 다 되어가는데요..."

아직 십분이 남았으니 빨리 뛰어갔다 오란다.

헐레벌떡 병원 언덕길을 오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온다.

아... 미치겠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건 또 뭐람… 이게 뭐야…

이러다가 어느 날은 약이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약을 구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병원 내의 모든 시스템이 모두 멈추어지고 처방전을 구할 수 없으면 약도 구할 수 없으면…

나는…? 나는…?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른다.

이놈의 의사는 오늘 왜 이렇게 속을 썩이는 거야.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자기 환자도 돌보지 않고 말도 않고 퇴근을 해버린 거야.

사람을 이렇게 골탕을 먹이는 거야... 왜... 왜...

그건 그렇고 그 젊은 놈의 의사는 처방전 하나 제대로 내리지도 못하면서 의사는 무슨 놈의 의사야...

여기 저기 진찰실을 다녀봤지만 담당 간호사마저도 보이지도 않는다.

간호사들 모두 퇴근을 하려는지 가방 하나씩 메고서 어딘가로 움직인다. 아마도 퇴근 준비를 하려는 것일 게다. 

안내데스크로 가서 사정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안내 데스크로 가란다.

그 곳에선 또 원내약국으로 가 보란다.

다시 또 원내약국으로 갔으나,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다며 처방을 내려 준 의사선생님을 찾아서 해결해 보란다.

내가 오늘 처음 본 의사를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안내데스크에서 방송을 해 주던가 연락을 취해 나를 만나게 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커피 향이 물씬 풍기는 로비에서 나는 홀로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서 있었다.

커피 향에 묻혀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이 산만함이라니…

로비 한 가운데 근사하게 해 놓은 크리스마스 츄리 옆에 코에 호수를 낀 환자가 멍한 눈을 껌벅거리며 하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운 좋게도 담당간호사를 만났다.

처방전을 들이밀며 다시 새로운 처방전을 요구 했다.

간호사는 오히려 이상한 약국이라며 병원 측에서는 아무런 잘 못이 없단다.

약국과 통화하고 여기저기 통화를 하면서 처방전에 무슨 V코드를 입력해야 하는데 그것이 빠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때서야 백배 사죄를 하는 것이라니…

나는 울먹이면서 도대체 사람을 너무 고생시키는 것 아니냐고,

아침 열 한 시에 나와서 여태까지 병원에서 이게 뭐하는 거냐고,

내 담당 주치의 선생님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벌써 세 번 째인데 바꾸고 싶다고 하였으나

미안해 쩔쩔 매는 간호사에게 더 이상의 타박은 무리였다.

그 간호사역시도 몇 시간 동안을 담당교수의 부재로 인하여 감당해 내야 하는 피곤함이 역력하게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일을 힘들게 병원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겨우 한 달치 약을 사 들고 집으로 오는 내내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죽은 것도 아니고 간신히 살아있는 生이라니…

이렇게 전전긍긍 매달려 살아야 하는 것이라니…

어느 날 쉽게 떨어질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아주 가벼운 존재감이 두려움을 만들고 있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 온다.

이제 곧 연말이다.

미아 삼거리. 현대백화점 앞에 크리스마스 연말을 알리는 장식이 켜져있지만

그러나 아주 차가운 느낌의 장식이 그리 따뜻하게 보이지가 않는 것은 너무 지쳐서 일 거다.

 

노란 불빛이 따스하게 새어나오는 집.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는 나의 가족,

저녁 상을 차려놓고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가족.

너무 사랑한다!

이 따뜻함을, 이 아늑함을, 이 평안함을 무엇과 바꿀 수 있으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 내 사랑하는 가족!

오늘 내 담당주치의 선생님께 드리려고 사 들고 간 싱고니움이 심어있는 크리스마스 컵이다.

어지간하면 담당간호사에게라도 주고 오고 싶었으나

너무 화가난 나머지 힘들어도 집으로 들고 와 버렸다.

아마도 이 컵화분을 볼 때마다 오늘 겪은 불쾌한 일이 생생하게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