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의 집
문선정
띠띠띠띠 띠리릭. 번호 키를 누르고 현관을 들어서자 진국 씨는 갑자기 들어선 낯선 공간이 혼란스러웠다. 이제 왔느냐는 눈빛으로 말을 걸어오던 아내가 없어서일까. 문득 아내가 없는 집은 지붕이 없는 집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군복무 중인 아들, 재수를 하겠다고 기숙학원으로 들어간 딸마저 없으니 지붕 없는 집엔 휑한 바람만이 모여 사는 것처럼 왜 이리 낯설기만 한 걸까.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국 씨는 먼지가 된듯하여 잠시 불안을 느꼈다. 렌지 위에 아내가 준비해 놓은 시래기 된장국에 밥을 먹을까 하다가 소주 한 병을 마시기로 했다. 이상하다. 아내가 없는 집으로는 절대 먼저 들어오기 싫어 기를 쓰고 술 모임에 나가던 진국 씨였는데, 무엇때문인지 그 좋은 술을 마다하고 집으로 들어와 아내를 기다리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요즘 들어 오라는 곳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 아내를 꼭 내 옆에 있어 달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것일까. 일일히 나이 계산하고 이것저것 따진다는 것이 구차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뭐든 편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여보, 나 오늘은 스터디모임에 나가야 하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지. 저녁은 다 해 놓았는데……. 전화 한 통화로 당당하게 모임에 나간 아내가 은근히 얄밉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 산 지 20년이 넘게 흘렀다.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 안에서는 입에 칼날을 물고 서슬 퍼렇게 달려들던 날이 왜 없었겠는가. 서로 뽑아든 칼날에 어디 한 군데 다치지 않았을 리 없겠지만,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상처를 보듬어주는 담대함으로 서로에게 길들여졌다고 할까. 아무튼 나이 50이 넘어서야 세월이 주는 지혜를 경이롭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스무 살 어린 처녀를 산에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5년 동안 일방적으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 진국 씨. 사랑 앞에서 솔직하고 적극적이었던 진국 씨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했다. 이제 서로 사랑하는 일에만 열중하자고 맹세한 봄날 같은 시절은 호로록 지나가 버렸고, 거의 일과 술에 빠져 지내는 날이 늘어날수록 아내에게는 재미없는 남편으로 이름 붙여졌다.
- 당신이란 사람 차암 진국이기는 헌데 사랑 표현에는 어찌 이리도 야박하단 말이오
- 내는 어쩌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과 살고 있단 말이오
- 품안에 있던 애들도 모두 품 밖으로 나가고 우리 둘만 남았소
- 이제 그만 날개옷을 내 놓는 것이 어떻겄소?
- 사는 게 힘들다고 느낄 때, 나는 날개옷을 입고 당신 만났던 수락산 물웅덩이 근처라도 한 번 가보고 싶소
아내가 질박한 너스레를 떠는 것처럼 말 할 때 웃음을 참느라 한 쪽 입술 끝이 올라가는 진국 씨 특유의 표정을 놓칠세라,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웃어보라 재촉하는 아내는 어쩌면 성우나 코미디를 했어도 잘 했을 거라.
진국 씨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벌레에다가 애주가이고 친구 많기로도 소문 난 사람이다. 일만큼이나 술 마시는 일에도 열중했으며 술을 마시는 날짜의 숫자만큼이나 주변엔 친구들이 넘쳐났다. 늦은 시간 술손님들을 데리고 집으로 쳐들어오다시피 해도 군말 없이 술상을 차려오는 것은 밖에서 흥청망청 마시고 다니느니 차라리 집에서 마시라는 아내의 술수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늦은 새벽까지 밖에서 술을 마시다가도 진국 씨의 전화 한 통화면 술에 쩔은 진국 씨를 태우러 나오는 아내. 늘상 싸움의 원인은 술 때문이었듯이 회식 자리에서 무모한 술 마시기 시합을 했던 어느 날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급기야 음식물의 잔여가 기도를 타고 폐렴으로까지 번져 장기 입원을 했던 몇 날 며칠을 두고 아내가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키워주고 집을 지켜주는 든든한 아내가 있으니 술맛이 절로 났기에 진국 씨의 음주행각은 지칠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이런 진국 씨에게 지친 듯한 아내가 아예 갈라서자고 으름장을 놓으며 목 놓아 통곡을 하면 며칠은 잠잠해졌다. 네 살 터울의 남매인 아이들을 기르는 일이며 교육은 당연 아내만의 몫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아내였지만 부득불 고집 세게 싸우고자 들이 댈 때는 옳다구나 하는 핑계로 더 당당하게 더 술을 마시고 다녔으니 아내는 바짝바짝 약이 올랐을 것이다. 지독히도 술과 친구를 좋아했던 진국 씨.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 늘어날수록 아내의 크고 작은 잔소리들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는데 별 것도 아닌 잔소리에 몸을 사리며 납작 엎드려주는 척하는 날도 꽤 있었다.
아내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던 일이 술뿐이었던가. 보증을 잘 못 섰다가 살림살이 여기저기 붉은 딱지가 붙어졌던 날엔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돐 지난 아이를 끌어안고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몫 돈을 빌려줬다 끝내 받지 못하고 달랑 육만 오천 원이 남겨진 통장의 잔고를 뒤늦게 확인한 아내는 막 아이를 낳은 몸으로 벌컥벌컥 낮술을 들이키더니 인사불성이 되었다 깨어난 후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옷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갔던 적도 있었다.
푸르렀던 시절, 싱그러운 봄날 같은 나이였던 아내는 진국 씨를 기다리는 일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녹음과 함께 만개한 봄꽃과도 같았던 시간 속에서 아내의 입에서는 세파에 깎인 팍팍한 노래가 흘러 나왔을까. 아내의 하늘은 시도 때도 없이 눅눅했을 것이며 아내의 근심을 타고 오른 구름은 만삭보다도 무거웠으리라. 돈벼락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명예벼락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가슴에 그리움을 채워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진국 씨는 어울리지 않는 다짐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리라 마음먹었다. 재미있는 사람이 되자. 아내가 웃겨줄 때 많이 웃어주자. 생애 가장 즐거운 파트너가 되자.
진국씨도 사람인지라 미안함을 느꼈는지 아내와 함께 뮤지컬 <넌센스 잼보리>와 영화 <내일의 기억>을 보러 가주기는 했으나 즐거이 박수를 치기도 하고 심각하게 감상을 하던 아내와는 달리 진국 씨는 그냥 건성건성 했다. 차라리 간단한 간식을 싸들고 동네 얕은 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책처럼 거니는 것이 훨씬 좋다며 아내를 꼬드겼다. 그래, 인생은 다 이런 거야. 스스로 낯선 것을 찾아 인생을 희극으로 몰아가고자 마음먹은 진국 씨가 철이 들기 시작했을까. 신혼여행을 제외한 국내 여행 한 번 갔다 온 것이 전부였을 때 아내는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다. 불안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생애 가장 즐거운 파트너가 되리라 마음먹었던 다짐은 금세 방향을 잃어버렸다. 아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금이 가고 있음을 느끼며 언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을까를 생각하다 벌어진 틈새에 깊게 박혀있는 시간 속에서 녹슨 못 자국들이 일제히 진국 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균열이 생긴 집에는 한동안 따뜻한 불이 켜지지 않았다.
병에 걸리고 두 세 달가량 힘든 시간을 보내다 안정을 되찾을 무렵 아내의 찰랑거리던 긴 머리가 훌렁훌렁 빠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가위를 들어 단발머리로 다듬고 잘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엔 혼자 미용실로 가서 스님 머리를 하고 와서도 전혀 우울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그런 씩씩함이 겉으론 의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많이 지쳐가고 있음이 보여 졌다. 어쩌면 아내가 병에 걸린 건 못 자국을 이겨내지 못 한 아내의 슬픈 얼룩이 한 뼘씩 한 뼘씩 번지며 병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술자리도 1차에서 끝내고 일찍일찍 귀가하자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족이란 카테고리로 묶여져<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들이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진국 씨는 아내에 관한 일은 한없이 너그러워지기 시작했으며, 아들은 자신이 너무 속을 썩여서 엄마가 병에 걸렸을 거라는 둥, 엄마 냄새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냄새라며 어리광이 심했던 딸아이도 조금씩조금씩 제 엄마를 놓아주기 시작했다. 아내의 집에 다시금 따뜻한 불이 켜졌다.
아내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낭만적인데다 낙천적이다. 화장을 하지 않고는 절대 외출도 하지 않더니 이제는 맨 얼굴에 돌아다니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다. 생전 늙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요즘의 아내는 중년의 티가 제법 나는 것도 병에 걸리고 부터라고 각인 시켜주곤 한다. 어쨌든 나는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싶었어. 아, 몹쓸 라인의 몸매에 이 넙대대해 진 얼굴 좀 봐. 신기해. 보여? 나는 오늘도 딱 하루만큼 늙었어. 아주 정상적으로 늙어 가고 있는 거라구. 자신의 부스스해 지는 모습을 어떡해서든 합리화 시키려는 아내가 차라리 편안해 보인다. 진국 씨의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불안이 언제 있었냐는 듯 아내 역시 많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내는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아픔의 시련과 고독으로 적당하게 다듬어진 여유로움으로 몸과 마음을 달래가면서 아내는 자신의 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휑한 바람만이 모여 있는 지붕 없는 집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신 진국 씨. 무작정 아내가 오기를 기다린다. 아내가 집을 지켜야만 비로소 집은 따뜻한 체온을 유지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중이다. 단순히 잠만 자고 샤워를 하고 신을 신고 나갔다가 들어오는 곳이 아닌, 집은 더없이 편안한 '쉼표' 이어야 한다. 이미 다 커버린 자식들이 엄마는? 하며 불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오늘은 진국 씨도 술 취한 웃음을 아내에게 흘리며 어색한 애교를 부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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