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처가 주는 아름다움
문선정
지금이 가을인가. 아니다. 가을은, 모든 것을 내어 줄만한 푸근한 몸짓으로 우리네 곁으로 다가와야 했다. 미처 여물지 못한 곡식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워있는 풍경은, 소박한 성찬을 위해 준비한 농부의 꿈이 몸 져 누운 것이리라. 상처 입은 풍경을 안스럽게 바라보며 '그래, 이것이 인생이야.' 라고 되뇌인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많은 상처가 생기듯 나의 生 가운데도 상처는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그 모습은 한 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오는 번개와도 같았으나 거친 숨이 가라앉는 순간 장엄한 터널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워주는 농부의 손길처럼 '괜찮아, 괜찮아!'라며 스스로에게 응원가를 불러주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치유하던 중, 더 이상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내 인생의 더듬이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진종일 웅크려 앉아 훌쩍거렸다. 어찌할까. 기쁨과 희망이 이제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한 줌 공기도 안 되는 내 영혼의 살인자가 되고 싶었다. 생명의 잔을 비워가며 죽어가야 하는 값싼 희망을 침묵으로 심판하면서 내 생애 가장 쓸쓸하게 보내야 했던 긴긴 시간들…
차랑차랑한 빛도 바람도 풀잎도 그 아무것으로도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도록 뒤틀리는 내 심사를 감당할 수 없던 어느 날, 송기환 목사님은 부드럽고도 단단한 동아줄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마치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장미꽃 넝쿨 늘어진 푸른 정원으로 인도하듯 천천히 기도의 세계속으로 나를 이끌어 주셨다. 고통의 끝에서 숙연하게 몸서리 치면서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얼마나 절실하게 불렀던가. 다행이다. 찰나의 내 육체가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을 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위로 받을 수가 있으니. 또 참혹한 추락이 예비되어 있는 절벽의 끝에서 부드러운 동아줄을 서슴없이 내려주고 번들거리는 내 얼룩을 닦아줄 그 누군가가 있으니 다행이다. 움켜쥐려고만 했던 삶에 백기를 드는 순간, 껌처럼 싸고 흔한 행복과 맞바꾼 욕망이란 덩어리들이 수천 개의 붉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으나, "이젠, 안녕"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무엇을 쥐고 있어야 마음 편했을 때보다 차라리 떠나는 것을 무덤덤하게 바라보자 다짐하니 저절로 무릎이 접어지고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메아리가 들려왔다. 내 깊은 우물속에 고여있는 눈물의 냄새를 퍼올리는 소리 였다. 이윽고 퍽퍽했던 가슴에서 웅성거리던 무서운 인간의 음성들이 박차고 뛰쳐나가자 거짓말처럼 슬픈 저녁의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오! 다시 삶을 지탱할 수 있다니! 주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내 입술에서 저절로 기도가 새어나왔다. 어느 날은 내게서 흘러나온 기도가 새처럼 날아다녔다. 난다는 것은 목메게 아름다운 것, 착한 눈빛의 사람들 틈에서 어렸을 때 보았던 마음 착한 별들이 보였다. 상처는 나를 단단하게 훈련시켜 주는 훈장었으며, 아팠으나 상처를 견뎌내던 시간은 낭만의 바닷바람이었음을…….
태풍이 지나간 시골 들녘은 어수선한데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계절은 마디마디에 난 상처를 서로의 냄새와 빛깔을 주고받으며 치유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저마다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출렁이며 흐르는 긴 언덕을 오르는 모든 생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꿈꾸는 항아리... > 시시한 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선정]시간이 흐릅니다 (0) | 2010.11.06 |
---|---|
[문선정]동두천의 가을 (0) | 2010.10.30 |
[문선정]아내의 집 (0) | 2010.02.23 |
[문선정]그 오래된 기억을 바라보며 (0) | 2010.02.01 |
[문선정]존재의 가벼움 (0) | 2008.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