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은 외로운 색이다.
자칫 노랑으로부터 광기나 희망을 잃었다 해도 그건 잠깐일 뿐이다. 노랑은 착란의 색이기 때문이다. 노랑은 고독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색이며, 그러므로 철저히 외로운 색이다. 그렇다고 노랑을 부정적으로만 내몰고 싶지 않다. 황폐해져가는 세계를 참을 수 없어 하는 우리들에게 그래도 노랑은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가르쳐줄 것만 같은, 그래서 노랑은 방향의 색이다.
내 인생의 몇 번, 노란색 꽃이 피었다. 살짝 피었다 거침없이 졌다.
개나리처럼 피었다 져머린 자리는 서러웠다.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못할 것만 같은 노랑이, 저 멀리로 사라져갈 때 나는 다시 가뭄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쓸쓸한 뭔가가 내려 쌓여 덮였다. 봄눈이었다.
인생의 환한 한 때를 돌이키는 일은 무모하거나 부질없는 일일 것이므로 나는 이 봄에 또 한 번의 쾌활한 노랑이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아주 우연일 것이므로 아주 난감하게 닥쳐와도 상관없다. 인생에 몇 번 찾아올 중앙선을 기꺼이 넘을 준비가 돼 있으니.
감자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의외의 것이 있다.
햇감자의 노란 피부와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난 금세 살이 오를 것만 같다. 노랑은 어둠에 닿자마자 신경질을 내고 빛으로 퍼지며 주변에 위안을 준다.
노란 옷을 입거나 노란 우산을 쓴 여인이 그렇다. 노란 구두를 신은 여인네를 보면 잡아 세우고 싶다. 왠지 길이라도 물어야 할 것 같고 따뜻한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 건네야 할 것만 같다.
당신은 나에게 해바라기를 건네준 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차 창밖으로 해바라기 밭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아끌며 "여기서 내리자!" 라고 소리쳤던 기억을 되살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기차표를 해바라기 밭에 내던져버렸던 것도. 그 기억은 잊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 때가 되었다고 해도 난 그 기억만으로 가끔 힘이 난다. 기차역을 등지고 해바라기 숲으로 내달을 때 당신의 몸을 빠져나온 웃음소리,당신의 머리카락이 만들어낸 바람 까지도 어쩌면 그토록 진할 수 있었는지 눈이 부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고 이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우리를 물들인 건 노랑이었으며, 해바라기 주변을 윙윙거리던 벌떼들의 소음이었겠으나 그때 우리가 만들어낸 흥취만으로도 해바라기 숲을 갈아엎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진 않았던가.
두 인간에게 찾아온 광란의 상당 부분을 다 쓰고 난 뒤 어지러워하던 그 날 이후, 노란색을 그토록 사무치게 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노란색 앞에서 토하고 싶었던 적 있었던가. 고마운 것이다.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수 있었으니. 다 끌어안고도 남는 것들이 있었으니.
노란색 포스트잇에 '밥 꼭 챙겨 먹어요'라든가 '내일 오후에 잠깐 들를게요'라고 썼던 글자들을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제 그만 할래요' 라고 바꾸고 잠적해버린들 그것이 그만 둘 수 있는,버릴 수 있는 마음이던가. 사랑은, 그만 둔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일어난 참 많은 일들을 밝은 색으로 그 경쾌함으로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당신을 질투하는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가 생겨버렸을 거란 추측으로 질투로 들끓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를 마음속에 제거한 사실을 질투하는 것이다. 배신의 냄새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후회하니? 나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불성실한 순가을 참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내가 그런 당신을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노란색 고름을 닮은 고집으로 인해 고독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라고 당당히 고쳐 말했어야 옳았을 것이다."미친 거지, 미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는 거지."
누군가 나의 넋두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해주기만을 바라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평화로웠다.
네 평 반짜리 간이역이 보였다. 우리가 내렸던 그곳이였다.
간이역 너머로는 해바라기 밭이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낡고 오래된 간이역에는 한가득 간이역을 점령한 노랑나비 떼가 나를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땐 내 트렁크에도 노랑나비가 가득 들어 있었으니까. 그땐 사랑을 마친 배후의 색깔, 노랑을 가방 가득 챙겨 넣고 다닌 시적이었으니까.
나는 이 세계가 당신과 나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으며 적어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별을 겪음으로 해서 노랑으로 가득 찬 세계는 비좁고 헐거웠으며 다시 결핍으로 덜그럭거렸다. 매일 폐쇄된 기찻길 끝에 피어난 개나리를 보러 나가야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온 몸이 따뜻해 질 수 있도록 그래야 했다.
저기 노랑이 웃는다. 봄이다. 그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긴 여행을 시작하기에 좋은 시간들이 몰려온다. 나는 곧 사랑을 피하러 먼 길을 갈 것이다. 사랑은 없으므로.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말이나 글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줄 수 없으므로 당분간 나는 노랑을 믿기로 한다. 당장 노랑은
내 감정의 원천일 것이므로, 내 인생의 중앙선과 내 청춘의 불만과 불안의 방지턱을 그리는 물감색일 것이므로.
츠지 히토나리 식으로 풀자면 사랑(행복)은 인간의 수만큼 다양하고, 내가 엿본 건 그 가운데 하나에 자나지 않는다.
나한테는 나에게 맞는 사랑(행복)이 분명 있을 거라고 이루지 못한 사랑 앞에서 바다괴물과도 같은 츠지 히토나리 식 논리는 과연 무슨 힘을 발휘할 것인가.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므로.
<이병률 여행 산문집 : 끌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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