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는 기쁨/전남진

[전남진]유언

문선정 2011. 4. 18. 20:51

- 유언

 

 

 

 

                                                                       전남진

 

 

 

 

 나는 지금 십이월의 플라타너스 아래 서서 비를 피하고 있다.

 조금 전 내가 내린 버스는 떠나고

 붉은 신호등 아래 가는 비가 내린다

 

 

 아내여, 나는 지금 숨이 가쁘다

 나는 너무나 많은 도시의 나쁜 공기를 폐에서 정화시켰다

 나의 허파는 도시의 신호등처럼 검은 먼지를 뒤집어써버렸다

 

 

 아내여, 그러므로 나는 분명 타살이다

 이 도시가, 지하철의 보이지 않는 먼지가, 버스의 매연과 금연구역의 담배연기가, 시도때도 없는 황사가, 직장의 노예제도가, 그리고 도시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나의 가난이 용의자들이다

 

 

 아내여, 기억하라

 

 

 나는 타살되었으므로 나는 보상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과 우리의 딸과 또다시 태어날 한 아이를 위해 나는 반드시 타살이어야 한다는 것을, 타살만이 내가 받을 평생의 급여와 가족들이 살아갈 여비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시대 산업재해로 죽어간 산업역군이므로 아내여, 적들에게 회유되거나 설득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집요하게 나의 죽음을 자연사로 포장하려 들 것이므로

 

 

 아내여, 나 이제 천천히 신호등의 먼지를 씻어내리는 비를 맞으며

 파란불 켜진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네

 이 비에도 싯겨지지 않는 나의 폐는

 내 속에 오염된 외로운 섬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얀 줄무늬가 점점 커지는 도시의 횡단보도 속으로 나 이제 천천히 사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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