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화
이일옥
모녀가 손가락으로 말을 뜨고 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조용하여 옆에서도 눈치 챌 수 없다
저 지문들 속엔 한 때
필사적으로 내달리던 들판이 있어, 꽃들 앞에선
모든 말들이 엉키기 쉬운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된다
세상 어떤 바람이 제 행방을 지워 꽃을 꺼내겠는가
모녀가 손가락을 뽑으며 말을 뜨고 있다
정류장 한 켠
저녁 어스름의 서쪽 모퉁이 한 켠, 그들의 말
다시는 올이 풀리지 않으려는지 꼭꼭 여며지고 있다
길 위에서 지붕들이 낮게 반짝이는 들녘에서
그들의 말은 야광처럼 어둠을 헤집으며 끊임없이 흘러 다닌다
그들의 수화한테 혹시 길을 물어 본 적 있는가
모든 생은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말 앞에
가을로 가는 길을 잃는다
절망에 이르는 길을 일러주지도 않는다
하물며 어디선가
이 도시를 지나치던 누군가에게 낯설게 뱉어내던
내 손가락 끝 지문 속의 지도들,
아! 저들에겐 얼마나 오래된 번민일까
초여름으로 향하는 오늘같은 날엔
내 안 지문을 풀어 저녁 강 하나 내어도 좋을
온통 푸른 물로 변할 것 같은 가로수 사이를 걷고 있다.
시집 『누란에 기대어』 (현대시,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