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야기 -나, 문숙자예요 문숙자!-
-문숙자
부모님은 자음 세개와 모음 두개를 붙여 "숙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내 이름. 문숙자!
보고 듣기만 해도 내가 대번에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수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가명과 예명을 쓰는 것처럼 외모만큼이나 이름에 대해서도 예민한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남의 입술 위에 얹어졌을 때 자연스럽고 예쁘게 올려지기를 바란다.
한 때, 나는 내 이름이 촌스럽다 생각하여 돈을 들여 이름을 바꾼 적이 있었다.
6.70년대 드라마에서나 들음직한 식모 같은 이름 "숙자"에서, 예쁜데다가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 "주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며 덩달아 얼굴도 "주연"이처럼 예뻐진 것 같다는 착각은 분명 주책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름 바꾼다고 얼굴까지 바뀌는 건 아닐 테고 이름 바꿨다고 행동까지 바뀌는 것은 아닐 텐데...
아주 조심스럽게 새로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연"이를 소개하기에 바빴다.
"저는, 문주연입니다."
문주연... 듣기만 해도 참 예쁘고 욕심나는 이름이다.
그렇게나 불려지고 싶던 이름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주연”이라는 이름과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정신이 든 것은 지금 생각하니 참 다행이다.
예쁜 이름에 부담스러움을 느낀 것은 어느 순간이었을까.
호적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이름이라서 일까. "숙자"가 "주연"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새롭게 소개를 하는 기분은 늘 개운치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숙자"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주민등록증 안에 꽁꽁 숨어살았다.
꿈결처럼 흘러간 유년의 기억들이며, 달콤하게 간직해야 할 과거들이 야금야금 녹아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2년 동안 무대의 주인공은 "숙자"'가 아니라 당연 "주연"이었다.
문집에 실리는 이름도, 잡지에 실리는 이름도, 심지어 명함에까지 주인공이었던 "'숙자"는 살아온 과거와 함께 저만치 물러나고 있었다.
뒤로 밀려난 “숙자”는 누군가에게 간절하게 불려지기만을 기다리며 한창 무대의 주인공으로 물오른 "주연"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봐 왔을 걸 생각하니 "'숙자"'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끔 "숙자"의 기억을 되살려 "주연"의 머릿속으로 기어 들어가 너는 굴러온 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가슴을 아스라이 적시는 음악이 흐를 땐. 유년의 "숙자"가 폴짝거리는 메뚜기를 잡듯이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다가. 젊은 날의 기억마저 붙잡으려 까치발을 떼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한 번 꼬리를 잡은 "숙자"의 기억은 강가며 들판이며 산이며를 헤매이다 골똘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또 어떤 기억은 생각보다 더 멀리 뻗어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 했다. 그 때문일까.
기억의 꼬리가 뭉쳐 조금씩 "주연"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을 "주연"으로 살기엔, 젊은 날의 "숙자"는 너무 사랑스러운 이름이라는 생각이었고, 흘러간 과거 또한 너무나도 소중했다.
내가 나은 아이들의 엄마인 이름이
함께 살아 온 내 남편인 아내인 이름이
달랑 한 분 남으신 시어머니의 며느리인 이름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위기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여 지어주신 부모님께 송구하다는 생각에까지 머물자 주민등록증에 새겨진 이름과 문집에 가두어진 "숙자"'라는 이름이 불만스레 꿈틀거린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꿈틀대는 안엣 것들이 드디어 "주연"을 완강하게 밀어낸다.
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을 부모님이 지어주신 "숙자"로 다시 무대에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주연"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싸이즈도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어정쩡한 연극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려진 빌려 입은 허깨비 같은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었다. 숨을 죽이고 기회만을 엿 보는 일에 눈이 똥그래 질 "숙자"를 흔들어 깨웠다.
잠시 뜸을 들인 "숙자"가 벌떡 일어나 좋아라 소리를 지른다.
"나, 문주연이 아니고 문숙자 예요. 문숙자!"
문숙자! 이제 내 이름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마저 느낀다.
어떤가, 이렇듯 자신만만하다면 세상이라는 넓은 무대 위에 내 인생을 펼쳐도 되겠다. 주인공로서의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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