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言)의 집을 지으며
이진영
오래 전에 집을 나간 나의 자모(字母)들을 불러모아
오늘은 말(言)의 집을 지어 봅니다
'ㅅ' 자에 'ㅏ'를 결합하니
'사' 자가 되고
'ㄹ' 자에 'ㅏ' 자와 'ㅇ'자를 결합하니
'랑' 자가 됩니다.
'사랑'
아, 아직도 나의 자모들이 '사랑' 을 기억하고 있다니
기쁩니다
오랜만에 일구어낸 '사랑'의 밑뿌리에서
촉촉한 물기가 배어 옵니다.
이번에는 'ㅎ' 자와 'ㅡ' 자와 'ㅣ' 자를 더하고
'ㅁ' 자에 'ㅏ' 자와 'ㅇ' 자를 더하니
'희망' 의 흙이 됩니다
콘크리트 생활 20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나의 자모들이 '희망' 의 흙을 잊고 있지 않다니
정말 대견스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정성을 다해
봄의 물푸레나무 어린 싹을 밀어 올리듯
외로운 나의 자모들을 모두모두 불러모아
'희망' 의 싹을 만들어
세상의 평원으로 슬며시 밀어 올려 봅니다
오랜만에 지은 말의 푸른 평원에서
나의 자모들이 쿵쾅쿵쾅
정말 반갑다고 춤을 춥니다, 눈물까지 쏟으며
그러고 보니 헤매이고 산, 미망(迷妄)의 세월
참 깁니다.
* 이진영 시집 수렵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