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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동갑 여성 시인 … 극과 극 시의 세계

문선정 2007. 7. 24. 20:43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103>

 

동갑 여성 시인 … 극과 극 시의 세계

 

여기 두 명의 동갑내기 시인이 있다. 김선우김행숙.

둘 다 1970년 소생이고, 여성이다.

무엇보다 이 둘은, 남들이 좀체 따라하기 힘든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 시 세계는 전혀 딴 판이다. 김선우는 한국 여성시의
전통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고,

김행숙은 난해한 요즘 젊은 시의 물길을 맨 앞에서 연 주인공이다.

김선우에게선 뜨거운 심장이, 그리니까 생명의 퍼덕댐 같은 게 만져지고

김행숙을 떠올리면 예민한 손가락과 매운 눈매가 연상된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집이 비슷한 때 출간됐다.

김선우가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를,

김행숙은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

#막무가내의 사랑 노래

김선우의 눈동자는 사연 많은 우물 같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는 짙고 또 깊다.

그 눈길이 살짝 스치던 찰나 언뜻 귀기(鬼氣) 같은 걸 느꼈던 것도 같다.

그 기운을 뭐라 부르던 상관없다. 세상을 향한 경계의 표시일수도 있고 시인이 건네는

사랑의 눈짓일지도 모른다.

김선우가 예의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Everybody Shall we love?

부분)라고 물을 때 그건 애교 어린 구애가 아니다.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서 하는 사랑이고

‘포성 분분한 차디찬/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끝’에서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구는 사랑이다. 말하자면, 목숨과 맞바꾸는 사랑이다.

하여 김선우의 사랑은 막무가내다.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는 사랑이고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몰려드는 사랑이다.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낙화, 첫사랑’부분)라며 온몸을 내던지는 건, 그 사랑이 어느 지극한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이고, 시푸른 육즙 뚝뚝 듣는 아욱이며, 소꿉 단지에 총탄을 모으는

팔레스타인의 소녀이고, 이태 전 세상을 뜬 위안부 할머니다.

#툭툭 내뱉기 또는 낯설게 말 걸기
김행숙은 김선우처럼 여성성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아낙네의 질펀한 수다 속에 여성의

성기나 생리 얘기를 거리낌없이 집어넣는 건 김행숙에게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김행숙에겐 없는 게 많다. 노골적인 사랑타령도 없고, 현란한 수사나 황당무계한

상상도 없다. 김빠진 일상을 멀거니 기술한, 뻣뻣한 문장만 즐비하다. 이를 테면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이별의 능력’부분)라고 밋밋하게 적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시가 된다. 이별 뒤에도 나의 하루는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는데 대부분

소비된다. 그래, 이따금, 하루에 2시간쯤? 당신 기억이 떠오를 것이고, 하여 아플 것이다.

김행숙의 매력은 이렇듯이 툭툭 내뱉는, 비쩍 마른 고유의 화법에 있다.

‘마차에서 말들이 분리되는 순간/마차는 스톱! 하지 않았다’(‘손’부분)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진 마냥 무미하다. 그런데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쓴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말발굽들처럼’이라고 이어붙이자 앞 문장에 돌연 화색이 돈다. 그러니까 마차는

시인의 손이다. 말과 떨어졌어도, 다시 말해 생각이 끊겨도 손은 스스로, 그것도 집요하게

움직인다.


-2007. 7. 24. 화<중앙일보/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