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는 기쁨/정일근

[정일근]그후, 오동꽃 피었다

문선정 2007. 5. 1. 23:57

   - 그후, 오동꽃 피었다

 

 

 

                                                 정일근

 

 

 

 

불현듯 너 떠났다 슬픔에 내 살 녹아

내 살 속의 뼈가 뼛속의 피가 녹아

나는 붉은 피로 남았다

내 슬픔 그 피에 녹고 또 녹아

눈물도 붉디붉은 피눈물만 남았다

지난여름부터 붉은 슬픔

붉은 피눈물 받아준 오동나무

그 독까지 다 받아준 오동나무

오늘 보랏빛 꽃 피웠다

더러는 누런 추억이 등 뒤로 찾아와서

귓불 간질이는 낡은 휘파람 불었다

운명이 내 등짝 짝 소리 나게 치고 갈 때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울었다

시를 쓰지 못하고 버려진 백지 위에

뚝, 뚝 떨어진 피눈물 스스로 길을 내고

그 길 따라 강물처럼 흘러갔다 끝내

바다에 닿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온 새벽

돌아보니 오동꽃 피었다

사람의 슬픔은 풍화하는 것이다

더 아픈 주검도 풍화하는 것이다

바람이 나를 깨끗이 씻어

보랏빛 오동꽃으로 활짝

활짝 피었다

 

 

 

 

 

- 정일근 시집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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