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여, 고마워요!/오-늘, 하루는

검은 날

문선정 2007. 3. 29. 00:08

겨울에 입던 옷을 다시 꺼내입었다

 

겨울 가고 봄이 올 줄 알았건만

 

깊숙이 두었던 옷을 다시 꺼내 펼쳤을 땐

 

번거로운 마음이 들었지만서두

 

오늘처럼 검게 그을린 도시에 떠도는

 

흙먼지와 싸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학교 옆, 주막.

 

투닥투닥 떨어지는 빗소리

 

삼십촉 백열등

 

오늘 같은 날엔, 마음 통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동동주 생각이 간절했다.

 

주점에 있던 학생들 모두... 빗소리에 잠시 수저질이 멈춰지는... 그런 시간...

 

이런 시간...이 소중했던...

 

에이!

 

신 새벽에 ByBy를 하고 나온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딴데로 새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고...

 

넵! 하고 서둘러 일어서는, 나는 나. 

 

 

회기역,

 

[섬진강 따라 벚꽃 십리 길]이라는 현수막에

 

마음 끌려가는 거 잡느라 애를 써야 했다.

 

때마침, 춘천행 열차가 지나가는데...

 

검게 그을린 날의 이런 유혹이란

 

참으로 참아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

 

겨울에 입던 옷을 다시 꺼내 입고

내 것도 아닌 카드 하나 들고

신 새벽 1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유령처럼 빠져 나온 내가요

 

[섬진강 따라 벚꽃 십리 길]이라는

현수막이 어둑하게 걸려있는 회기역에서

희미한 풍경에 하롱하롱 취해있는 데요

한 점 푸르름도 남겨놓지 안은 검게 그을린 도시

이런 푸른 빛이 단절된 도시에선 먼 데가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이렇게

세상에서 제일 낮은음자리로 노래하면서

거뭇거뭇하게 그을린 도시를 헤엄쳐

벚꽃 십리 길 화려한 섬진강에 가면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누런 흙비 말고

흐드러지게 내리는 꽃비를 맞을 수 있을까요

아 아 아아 하고 크게 입 열고 꽃비를 마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