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는 기쁨/좋은 수필 읽기

[양효숙]길위의 미루나무

문선정 2016. 8. 26. 02:28

길위의 미루나무


양효숙






학교를 변화시켜 세상을 바꾸자고 학교비정규직들이 릴레이 피케팅을 하고 총파업도 한다. 급식실에서 밥을 하다 나오고 누군가의 얘기를 듣다가 상담실에서도 나온다. 대부분 여자들이고 아줌마다. 길 위로 나온 여자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누군가의 엄마요 아내이며 예쁜 여동생이다.

학교에도 비정규직이 직종별로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가르치는 학교 안에도 노동의 차별과 차이가 있다.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은 없애야 하기에 목소리를 낸다. 제 몫을 다한 몫에 대한 목소리이기에 역동이 있고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게 많다.

월급이 얼마냐고 거침없이 묻는 학생 앞에서 할 말을 잃을 때도 있다. 궁금한 걸 물어보는 건 창피한 게 아니라 용기 있는 거라고 말하면서도 구겨진 자존심과 내려간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바빴다.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장래희망에 정규직이라고 펜에 힘을 준 채 눌러 쓰겠지.

학교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에 꿈을 이뤘다고 말하면서도 아닐 비(非)라는 글자 하나가 늘 불편하게 따라 다녔다. 아닐 비(非)를 매일 곱씹다보니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했다. 누군가의 꿈인 직업으로 내 뒤를 이어가게 하려면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인생 자체에 정규직 인생과 비정규직 인생이 있는 게 아닌데 점점 현실은 비정규직으로 내몰았다. 바늘구멍을 통해 숨을 쉬면서 숨 막히는 일상을 그야말로 견디며 산다. 열아홉 책임감 강한 젊은 노동자도 지하철 스크린도어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책임감 강한 나 또한 초록 옷을 입은 노조 사람들과 더불어 길 위로 나섰다.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위험하고 거친 길이라고 겁을 줘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차별에 맞서 울다 나온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 서로에게 용기를 준다. 눈물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동병상련 안아주면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가면 통곡의 미루나무가 있다. 미루나무 두 그루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심겨졌는데 한 그루는 살았고 다른 한 그루는 죽었다. 살아서 제 잎을 꺼내놓는 나무 옆에서 죽은 나무가 핏기 없는 입으로 말을 건넨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을 나무가 나무라기라도 하듯 쳐다보기만 해도 전해지는 게 있다. 나무로부터 사람의 체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의 말이 한 가지로 통하듯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게 아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저 바보처럼 믿었을 뿐 사실과 진실의 윤곽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초록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두 나무 얘길 나눈다. 길 위의 미루나무인 우리도 우리들만의 할 말이 있는 것이고.

왜 통곡의 미루나무일까. 설마 나무가 우는 건 아니겠지. 누군가 나무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나라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사형장으로 끌려갔으니 억울했을 것이다. 사형장 입구에 서 있는 미루나무는 살아서 독립을 보았고 사형장 안에 있는 미루나무는 무명의 독립운동가처럼 죽어갔다. 단순히 나무로만 서 있지 않고 오늘도 나이테를 만들며 재생 중이다.

그 누구보다 그늘을 넓고 짙게 만든 거목으로 자리매김한 사람과 나무가 한 가지로 통한다.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그루 나무가 된 채 담장 안팎도 별다를 게 없어 보인다.

바람이 불고 이파리가 흔들리자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찬 기운에 머리가 도리어 맑아진다. 시신이 나온다는 원통형 시구가 누군가의 목구멍처럼 열려 있고. 독립운동은 유관순열사만 한 게 아니었다.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의 맥박이 동시에 잡힌다. 시대적 아픔이 묻어나고 이야기는 꼬리를 문다.

시인 윤동주는 오늘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것이고. 윤동주 시를 베껴 쓰며 또 다른 윤동주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 때 잘 나가던 전업 작가도 생활보조금을 받는 불안정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잔치가 끝난 건 아니겠지.

고문 받은 얼굴이 서로 비슷하게 보이고 읽힌다. 무표정한 얼굴로 더 많은 말을 한다. 붓기 있는 얼굴을 마주한 채 누가 더 예쁘게 생겼다고 말해서는 안 될 사진 너머의 사진들이다. 실물 크기로 제작된 일본 순사가 그런 우리를 지켜본다. 자원 봉사하는 중학생들이 곳곳에 서 있고 현장체험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이 지나간다. 담장 너머 감시의 눈초리는 폐회로텔레비전(CCTV) 형태로 더 발달돼 삶 자체가 감옥일 수 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것보다 차라리 잡혀 들어오는 게 낫다고 범죄를 다시 저지르기도 하고. 담장 밖은 여전히 시끄럽고 불안하며 부끄럽다. 겁먹은 미루나무처럼 저마다 웅크린 자세다.

초록 잠바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생각이 달라진다. 통곡의 미루나무를 위로하면 위로의 미루나무로 변할 것만 같고. 나무의 위로와 사람의 위로가 한 가지로 통할 것만 같다. 인간 숲이 더불어 숲으로 변해야 한다고 행진하며 나아간다. 구호를 외치며 거리 시위를 하니 이전에 느끼지 못한 생각들로 차오른다. 밑그림을 크게 그리면서 더 큰 학교를 상상한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존재감마저 드러나지 않기에 더 큰 목소리를 내다보니 통곡에 가깝다.

차별에 맞서는 초록빛 옷을 입고 오늘도 길 위로 나선다. 제자리가 전부인양 우두커니 서 있기보다는 길 위의 미루나무로 걷는다. 제 몸을 불쏘시개로 사용했던 전태일을 만나고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약속을 지킨 노동자의 어머니도 마중 나와 있다. 누군가 막힌 담을 목숨 바쳐 허물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다고. 더 높은 담장이 에워싸고 보이지 않는 담장이 겹을 이뤄 다가와도 출구를 만드는 이는 시대마다 있어 왔다면서.

모두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곳을 찾아 오르며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오지 못한 채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서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섭고 외로운 투쟁이다.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말할 게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고 생각하며 들어줄 일이다.

피켓과 플래카드 도구를 맡아주는 포장마차 할매가 있다. 포차 특성상 저녁엔 밥을 하지 않고 술을 파는데 우리 인원수보다 더 많은 밥을 지어 놓고 기다린다. 나라를 구하고 돌아온 이들을 맞아주기라도 하듯이 고봉밥을 내온다. 따뜻하고 큰 그늘을 만들 줄 아는 할매다. 우리 하는 일을 캐묻지도 않고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듯 포용한다. 밥과 반찬을 비우며 포차할매 고향인 광주를 생각했다. ♣

'詩 읽는 기쁨 > 좋은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베르 까뮈]시지프의 신화  (0) 2012.01.11
[김점선]무서운 년  (0) 2011.06.09
[전혜린]밤이 깊었습니다  (0) 2011.04.18
[목성균]혼효림  (0) 2011.02.08
[목성균]어떤 직무유기  (0) 2011.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