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낭만주의와 문학적 세계주의
바이스슈타인이 <비교문학의 역사>의 서두에서 말한 비교문학의 학문으로서 초기 단계, 선사 시대를 뜻한다. 17~18C의 대표적인 문예사조는 고전주의1이다. 독일의 낭만2파(ex 루소, 괴테, 헤르거)들은 이를 거부하고 국민문학3을 형성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도 스따알 부인이 국민문학적 개념을 형성한다. 이들은 국민문학적 개념을 초국가적 세계주의로 확대해 그 유사성을 추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비교는 단순 영향관계의 탐색에 그쳤고, 국제간의 문학적 교류의 역사적 방법을 구체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헤르더(1744~1803)와 초국가적 시야 : <오시안(스코틀랜드시인)과 고대민족의 가요에 관한 왕복사간>(18국 160곡 수록)에서 어느 한 민족이나 습관을 고찰할 때, 자국의 상황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개인도 만인을 위해서 존재한다(남=나). 모든 인간은 통일성(이성, 정의, 선의, 세계성→보편성) 희구. ‘민족시가의 재생된 힘(특수성, 국민문학)’을 바탕으로 문학사를 확립할 것을 주장.
스따알 부인의 <독일론> : 프랑스에서 낭만주의의 ‘세계성’ 최초 자각. 국가는 그들 상호간의 서로 지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는 외국의 사상을 수용함에 있어서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경우, 환대하는 주인이야 말로 부의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괴테의 ‘세계문학’ 주장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토대마련). 허나 사회제도와 관련한 고찰이라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은 국민문학에의 ‘집중’과 함께 외국문학으로 지향하는 ‘확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실레겔과 ‘세계시’ : 형 A.W.실레겔은 헤르더에 의한 계획의 예시적 암시를 발전 시켰다. 실레겔 형제는 서구를 넘어서 동구, 산스크리트의 문학도 연구하였다. 그들은 낭만주의를 유럽 여러 나라에 파급시켰다. 문학사가인 형 서구문학의 제역사를 고전주의 대 낭만주의의 이원론으로 개관하였다. 그들에 의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 낭만주의가 널리 알려졌다. 동생 F.실레겔의 ‘세계시’는 낭만주의 시를 일컬으며, 비교문학과 관련해 세계주의와 합치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괴테의 ‘세계문학’ :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에 대한 자각. 뒤이은 지적 국경의 철폐와 그에 따른 외국문학과의 자유로운 교류과정 중에서 문학 공통의 이념, 즉 각국의 문학 속에 있는 ‘세계성’을 희구하려는 가운데 발생했다. 이 세계문학의 개념은 낭만주의와 함께 대두되었다. 괴테가 세계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1827년 희곡 <탓소4>의 프랑스어 역에 대한 논평에서부터였다. 그는 번역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민족 상호간의 이해를 통해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비교문학의 지향점과 일맥상통하며, 실지 세계문학은 비교문학의 발상근원이 된다고 여겨진다. 세계문학은 세계를 하나의 통일된 정신적 유기체로 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지만, 그 세계의 범위가 유럽대륙으로 한정되어 서구문학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으며, 세계문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지 않은 점도 괴테의 한계를 시사한다.
2. 문학간의 교류와 유사성
19C초엽, 프랑스에선 역사과학이 발달한다. 이에 따라 문학비평은 심미적 영역(미의 본질을 규명)에서 벗어난다. 국민문학은 역사적 관념을 띤다. 즉 자국 고유문학의 특질은 연구함과 동시에 외국문학의 연구에 대한 관심도 고조됐다. 바이스슈타인은 1820년대 후반에 소르본느대학에서 국제문학 강의를 개설한 뷜르맹과 앙뻬르를 비교문학의 진정한 창시자로 보고 있다. 비교문학은 1830~40년대에 성숙기에 이른다. ‘비교(Comparee)’라는 개념이 문헌학, 해부학, 생리학과 동시에 문학에도 대입됐기 때문이다. 허나 이 당시 비교문학가들은 예술적 요소와, 철학, 사회학적 요소를 구별 없이 혼동하고 있다. 그들은 여행하고, 열중하고, 논의하고, 비교했으나, 여러 나라의 문학에 관한 지식을 병치할 뿐이었다. 그들은 비교문학의 체계적인 방법론을 세우지 못했다.
뷜르맹과 국제문학 강의 : 뷜르맹이 소르본느대학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국제문학 강의는 비교문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초국민적 관점(탈자국주의) 에서 강의했다. <프랑스 문학강좌>의 서문에서 뷜르맹은 “프랑스대학에서 처음으로 동일원천에서 파생되어 상호교류를 단절하는 일 없이 여러 시대에 걸쳐서 혼합되어 여러 나라의 근대문학에 대한 비교분석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앙뻬르와 제국문학의 비교사 : 앙뻬르는 뷜르맹에 이어 그 당시 프랑스의 비교문학을 주도한 문학연구가이다.5 뵈브는 앙뻬르를 비교문학의 콜럼버스라고 격찬했다. 그는 수개국어에 정통하며(언어학자), 역사가로도 활동하고,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방법론을 대입했다. 19세 때 괴테를 방문해(1819) 깊은 감명을 받고, 1832년 뷜르맹에 이어 <제국문학 비교사>를 강의했다.
시스몽디 : <南歐(남구,남유럽) 문학>(1813)의 저자 시스몽디는 어떤 국민의 정치적, 종교적 역사가 그 국민문학에 미치는 영향과 그 국민성에 대한 문학의 영향을 파악해서 정의나 성실성의 기준과 미의 기준과의 관계. 미덕과 도덕, 감수상과 상상력과의 관련성을 해명했다.
쉐러의 <비교시학> : 독일문학의 학문적 연구는 쉐러와 슈미트에 이르러 본궤도에 올랐다. 그 이전의 고전문헌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슈미트는 독일문학 이외의 현상에 관한 연구도 독일적인 견지에서 해야 한다고 하는 비교적 소박한 이론을 제시했다. 쉐러는 <비교시학>에서 하우프트를 비교문학의 개척자로 평가한다. 하우프트는 문화관계의 유사성을 파악한 사람이다. 쉐러도 마찬가지로 <비교시학>의 방법을 유사성에 의한 것, 상호간의 영향에 관련된 것, 테마의 유사성(민속학, 신화학 기반)을 연구하고자 한다. → 영광된 테마톨로지
3. 사실관계와 영향연구 : 1870년대에 독일의 학자, 쉐러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들이 나폴리와, 제네바에서 강의와 논문을 통해 비교문학의 방법론을 보급시켰다. 그러한 비교문학은 1880년대에 현저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포스네트의 <비교문학> : 영국의 비교문학에 가장 큰 자극을 준 인물. 그는 법률가이며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대학 고전언어학과 영문학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가 쓴 <비교문학>은 비교문학에서 최초로 간행된 총괄적인 이론서이다. 이 책은 국제과학총서의 한 부문으로 간행되어, ‘비교문학’ 명칭 확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문학사를 사회사의 일부분으로 판단했다. 그는 특히 ‘집단으로부터 개인적인 삶’으로서의 사회적 발전 연구를 중시했다. 이는 즉 한 씨족으로부터 도시, 도시로부터 국가, 국가로부터 세계주의적 인간성을 지향하는 사회단계의 확대를 비교문학 연구의 순서로 삼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비교문학은 초국가적이 될 필요가 없고, 여러 나라 문학의 내적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스네트는 <비교문학의 과학> 논문에서 비교를 역사와 동의어로 보고 있다. 바이스슈타인은 포스네트의 비교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격리된 수준에서 적용된다고 본다. 포스네트가 주장한 비교문학 방법론은 사실을 존중하는 과학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추상적으로 흐른 결함이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불러일으킨 각국에서의 반향은 자못 컸다. 그의 이론은 비교문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걸로 높이 평가된다.
막스 코흐의 <비교문학사 잡지> : 독일에서 비교문학의 모색 노력이 막스 코흐의 <비교문학사 잡지>로 결실을 거두게 된다. 잡지 창간호에 기고한 막스 코흐의 선언은 독일 비교문학의 전환점을 이룩했다. 그는 <비교문학사 잡지>나 자매지인 <비교문학사 연구>에서 신화나 동화의 비교연구, 테마톨로지 연구, 유럽과 비 유럽권(인도∙아프리카∙중국)에 관한 민속학적 연구6를 넘어서 정치, 종교역사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브륀띠에르와 국제문학 대운동사 : 브륀띠에르는 비교문학의 권외에 있으면서 비교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고등사범학교의 강단과, <양세계평론>지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그는 ‘국민문학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의 연구를 위해서는 비교문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문학의 국제적 대운동의 역사를 정확히 기술할 것을 주장했다. <서구에 있어서의 페트라르키즘7의 역사>와 <외국에 있어서의 스페인의 코메디아(즉흥 희곡)> 등의 출현을 갈구했다. 그는 1900년 파리에서 비교역사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비교문학사 부문의 의장직을 맡았다. 그 때 그는 근대 서구의 5대 문학, 즉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의 걸작을 대조하고 그 연관성을 조사해 이들의 접촉과 계승관계를 확립했다.그는 또 떽스트와 베쯔를 길러냈다.
떽스뜨의 고증적 방법 : 그는 비교문학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게 했다. 고등사범학교에서 브륀띠에르에게 지도를 받은 떽스뜨는 35세에 요절하게 된다. 그는 1896년 리옹대학 최초의 비교문학 담당자이고 최초의 전문적인 비교문학자이다. <루소의 문학적 세계주의의 기원8>에서 프랑스문학의 교류사라는 커다란 문제를 현대적 학식과 식견으로 고증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과학적 비교연구의 최초의 저서로 생각된다. 텍스뜨는 비교문학은 ‘인종 및 인간의 심리’연구의 기반에 있다고 생각했다. 바이스슈타인은 이런 텍스뜨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많다고 말하면서, 그의 그런 생각이 과학과의 경미한 타협을 느껴지게 했다고 본다. 그는 또한 <프랑스문학사>의 편집에 참가해 그 서문에서 베쯔의 <서지목록>을 소개했다. 1900년에 간행된 베쯔의 <비교문학 서지> 초판 서문에서 떽스뜨는 비교문학의 범위를 ①이론상의 문제 및 일반적 제문제 ②비교민속학 ③근대문학의 비교연구 ④세계문학사(방띠이겜의 일반문학에 해당) 등으로 세분하고 있다.
베쯔의 서지목록 : 알사스 지방 이민의 아들로서 1861년 미국에서 출생해 스위스에서 성장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브르와 독일 예나에서 법률공부를 했다. 1890년경 취리히에 돌아와서 근대문학을 연구했다. 떽스트가 비교문학을 확립한 바로 뒤, 베쯔는 비교문학을 획기적으로 비약시킨다. <프랑스에서의 하이네>(1895)로 학위를 받은 베쯔는 1902년 <비교문학 연구>를 간행했다. 그는 비교문학에서 거둔 연구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 그는 비교문학의 안내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Cf)비교문학의 창시자는 떽스트
텍스뜨와 베쯔의 비교문학사에서 남긴 그 공적은 매우 크다. 그들의 업적을 바탕으로 프랑스 비교문학이 확립되었다. 그들의 고증적 방법론과 서지목록 작성 시도가 없었다면, 비교문학의 거장인 발당스뻬르제가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4. 비교문학 이론의 확립 : 발당스뻬르제와 방 띠이겜이 비교문학의 방법론을 논문이나 저서로 형성했다. 즉 발당스뻬르제의 <비교문학, 그 용어와 실제>와 방 띠이겜의 <비교문학>이 비교문학의 강령이면서도 그 이론적 지침이 된 것이다.
발당스뻬르제와 비교문학의 거장 : 떽스트의 후임, 떽스뜨와 베쯔의 선구적 유업을 계승했다. 그는 저서 <프랑스에서의 괴테>(1904)를 발표해 “고찰하려고 하는 시대의 신문이나 잡지를 조직적으로 낱낱이 검토하고, 영향의 극히 하찮은 증표도 잡아 여론의 동향을 추구” 했다. 이는 그 전 시대엔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방법이다. 그리고 그는 베쯔의 <서지목록>을 계승해, 비교문학의 서지목록을 집성했다. <비교문학 평론> 창간호에 <비교문학, 그 용어와 실제>는 소르본느학파의 강령이 되어 왔다. 그는 문학간의 ‘의존관계’를 전제하지 않고선 어떤 비교도 쓸모가 없다. 기계적이고 인과관계에 의해 진행되는 역사적 발전을 전제(진화론에 기반)로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한 브륀띠에르의 진화론을 반대했다.
아자르와 일반문학 : 발당쓰뻬르제와 쌍벽을 이룬 비교문학자. 방대한 저작활동을 함. 남구문학과 프랑스문학의 연관관계를 연구함. <서구의식의 위기>, <18세기에 있어서의 유럽사상> 일반 문학(인류의 보편성에 기반한 연구)적인 관점에서 그의 지식을 종합한 서적들을 남김.
발당스뻬르제와 아자르의 제휴는 비교문학의 학문적 기반을 굳건히 다지게 함. 이러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비교문학이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됨.
방 띠이겜의 <비교문학> : 발당스뻬르제와 동시대 인, 그가 남긴 <비교문학>은 체계적으로 서술되고 방법론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최초의 개설서이다. 그는 비교문학에서의 ‘Comparee’의 기원을 문헌학(특히 비교언어학), 해부학, 생리학의 비교와 거의 동시에 영향을 받아 문학사에 도입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문학사에서의 비교 그 자체는 한 발자국도 기여하지 못한다고 서술하며, 비교라는 용어의 일체 미적 가치를 철폐(단순비교)하고 역사적 가치(큰 공적을 남길만한 성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서술했다.
발당스뻬르제와 방 띠이겜의 비교문학 방법론은 프랑스 비교문학의 전통이론으로 웰렉의 일반문학 이론이 대두되기 이전에 적용 되었다. 그들은 국제간의 문학적 영향 관계를 전제로 문학작품들을 비교연구했다. 그들의 문학사연구는 국민문학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명하는 게 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두 학파의 대립과 위기 의식
귀아르의 <비교문학>은 영향과 사실관계를 강조한 프랑스 비교문학의 방법론서이다 이 책 머리에 까레(귀아르의 스승)이 쓴 <서문>은 프랑스파 비교문학의 전통이론을 집약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프랑스 비교문학의 전통은 신랄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웰렉과 워렌 공저의 <문학의 이론>을 위시해, <비교문학의 위기>(비교문학이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들로 이어지는 과정은 프랑스파 비교문학과 미국파 비교문학의 극한적 대립이라는 인상이 들기에 이른다. 프랑스 자체 내에서 에띠앙블과 같은 자성론이 대두하기도 했다.
까레의 비교문학 정의 : 소책자인 귀아르의 <비교문학> 서문에 자신의 비교문학관을 세 가지 명제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비교문학은 단순히 문학의 비교가 아니고, 문학사의 한 분야이며, 일반문학이 아니다.” 이런 그의 정의는 웰렉과 워렌의 <문학의 이론>에서 제시한 일반문학을 염두해주도 내린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정의는 국제간에 이루어진 문학적 영향관계를 전제로 한 사실존중과 인과론을 중시한 것으로 요약된다. 작가와 작품 사이에 주고 받는 영향관계의 탐색을 국한으로 하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의 괴테>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이것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등의 영향양상을 유형화 해 그 특색을 밝히고 있다. 어느 한쪽도 자국이 아닌 외국간에 있었던 영향관계를 고찰했다는 점에서 괄목할만한 비교문학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귀아르와 국제간의 문학적 관계의 역사 : 까레를 비롯한 전통적인 발당스뻬르제와 방 띠이겜 등의 프랑스 비교문학에 관한 범주를 그대로 계승한 경향을 보인다. 그는 “비교문학이란 비교가 아니다. 이것은 부적당하게 이름 지어진 과학적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간의 문학적 관계의 역사’라고 정의한다면 훨씬 정확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비교문학의 실증주의적 차원의 방법론을 강조했다. 번역, 비평서, 신문, 잡지, 여행기 같은 매개물의 철저한 탐색으로 한 작가의 영향과 원천을 살피려고 했다. 또한 비교문학과 일반문학의 차이를 “셰익스피어와 라신느 사이에 필연적으로 보여지는 공통점을 서술하는 것은 비평과 웅변(설득을 목적으로 한 연설, 일반문학의 영역)의 영역이다. 셰익스피어가 몽떼뉴9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일, 그 지식을 어떻게 자기의 극에 활용했던가를 조사하는 것이 비교문학이다.” 라고 예증한다. 51년에 출판된 그의 <비교문학>은 일반문학을 의식해서인지 아시아 비교문학 연구 가능성을 시사했다(국제성 감안). 프랑스파의 비교문학의 경직성에 대한 비판이 대두할 때쯤 나와서, 미국학자(웰렉), 자국 내(에띠앙블)에서도 반발을 받게 된다.
웰렉과 일반문학 : 프랑스 비교문학의 방법론을 정면으로 거부한 미국학파의 대표주자. <문학의 이론>(워렌 공저), <비교문학의 위기>등 많은 논문에서 ‘일반문학’의 방법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즉 문학작품이 원천과 영향의 총체만은 아니기 때문에, 문학이론과 비평이 추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학의 내재현상으로서의 본질을 추구하여 그 보편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는 <비교문학의 위기>에서 사실관계와 인과론을 바탕으로한 발당스뻬르제, 방 띠이겜, 까레, 귀아르 등의 프랑스 비교문학의 방법론을 비판했다. 또 <비교문학의 본질>에서 비평을 도입해 ‘보편적 문학사’라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 즉 그것은 민족문학과, 일반문학, 문학사와 문학비평을 동시에 충족하는 넓은 시야의 비교문학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문학연구는 직접 대상 그 자체에 접근하여 분석과 가치판단을 유도해야 한다. “인간의 도덕과 운명에 대한 예술과 시의 승리, 상상적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예술과 시의 창조를 이해하면 민족적 허영은 사라지게 된다.(국민문학의 틀 거부) 문학연구는 상상의 행위이며 인류의 고도한 가치를 보유하고 창조하는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프랑스 비교문학의 전통이론에 대한 반론이며 그 반향은 자못 컸다. 웰렉의 일반문학은 프랑스 전통이론에 비해 보다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레마크는 서술한다. 비교문학은 문학사와 문학비평의 커다란 두 영역간에서 격렬히 벌어지는 논쟁의 영향을 계속 받아왔다. 그 기원과 기능면에서 볼 때, 비교문학은 문학사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많은 비교문학자들에게 문학비평의 이론을 채택하라는 요구는 자살에로의 초대인 것처럼 보여졌다. 하지만 비교문학은 ‘신비평10’학파에게 비난을 받아왔다. 신비평학파는 문학작품을 작품 그 자체만 보려고 했다.
에띠앙블과 비교문학의 위기 : 까레의 후임으로 교편을 잡은 교수. 그는 취임강연에서 ‘비교문학의 위기’를 진단했다. 에띠앙블은 프랑스학자의 전통이론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에띠앙블 이전에 아웃사이더들이 전통이론을 반론한 예를 찾아보자면 모리의 <미술과 비교문학 : 현재의 문제점>과 프라삐에의 <중세문학과 비교문학>등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모리는 타영역과 문학을 비교했으며, 프라삐에는 중세를 비교문학의 영역에 끌여들어 역사적 관련성이 없어도, 시한적인 제한을 초월해 비교문학이 성립된다고 역설했다. 그는 <비교문학 및 비교는 비합리적이다> 논문에서 비교문학의 위기에 대한 처방과 치유의 목적을 국수주의 대항, (개별나라에서의) 지방주의에 대항, 휴머니즘 추구 등으로 들고 있다. 이런 그에 대해 레마크는 “역사적으로 동양을 지향한 학문을 버리길 원치 않았던 에띠앙블은 미학과 문학적 유추의 실용성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양의 문학에 대해 예리한 주의를 호소하는 미국인들과 합류하였다.” 평가한다. 그는 실재로 미학과 미학적 유추의 실용성에 흥미를 느꼈으며, 아무런 역사적 관련성이 없는 두 개의 상이한 문학도 비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교문학의 궁극적 목적을 내재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으로의 지향으로 삼고 있다.
6. 화해의 모색과 융합점 : 뻬이르, 레마크, 삐슈아, 루소, 바이스슈타인 등에 이르러 프랑스 학파와 미국학파의 대립양상을 조정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그들은 조화를 시도하려고 했고, 어떤 한나라의 지역성에 국한하기 보다 각자의 취향에 따르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뻬이르와 두 흐름의 융합점 모색 : <셸리와 프랑스>의 저자 뻬이르는 이 책에서 비교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셸리를 통해 프랑스 및 영국 리얼리즘의 우여곡절을 고찰했다. 그는 프랑스의 비교문학의 방법론을 긍정하고 그 당시 새로이 대두된 일반문학적 방법론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실증적 방법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인다. 즉 한 작가의 생애와 창작동기 및 환경을 밝혀서 작가나 작품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이론을 도입하는 새 비평 방법의 부정적 측면도 시인한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이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미적 차원을 배제하는 연구태도를 지양할 것을 강조하고, 두 태도의 장점을 살려 화해와 융합을 찾으려고 했다.(헤겔의 변증법)
레마크의 비교문학 영역의 확대 : 그는 프랑스학자들과 미국학자들의 방법론적인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융화를 꾀했다. 그의 저서인 <십자로에 선 비교문학>은 프랑스학자와 미국학자들의 비교문학 방법론의 상이점을 들어 서로 접근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 융합점을 찾아 제시한다. 또 다른 저서인 <비교문학, 그 정의와 기능>에서 비교문학의 영역을 보다 넓게 확대한다. 즉 다른 지적 영역(회화, 조각, 건축, 음악과 같은 예술, 철학, 역사, 사회, 과학 종교)도 비교문학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즉 그것은 한 나라의 문학과 다른 인간의 표현영역과의 비교라고 할 수 있다. 레마크는 ‘역사’와 ‘비평’은 비교문학의 기대를 성취하기 위해서 연합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이것은 두 파의 거리가 좁혀지고 있는 실정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삐슈아와 루소의 <비교문학> : 삐슈아와 루소는 <비교문학>에서 프랑스 비교문학 방법론의 변모를 보여준다. 한 사람은 역사적 입장으로 기울어져 있고, 한 사람은 철학의 편에 기울어 있다. 이 두 사람의 논의는 변증법적인 교류관계의 성격을 띤다. 그들은 영향관계의 규명에 제한된 전통이론에서 벗어나 연구영역을 보다 확대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사실과 인과론을 바탕으로 한 영향 연구에만 제한된 전통이론의 한계를 초월해, 문학의 유사현상과 영향관계를 동시에 추구하려고 한다. “사실관계의 의존으로부터 상상력, 직관력의 인식이나 유추현상의 도입, 문학과 문학 이외의 영역과의 비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바이스슈타인의 <비교문학과 문학이론> : 그는 인디애나대학의 강의내용을 중심으로 독일어로 된 <비교문학개론>을 출간한다. 이 책은 5년 뒤 <비교문학과 문학이론(미국학파,일반문학적 성격)>으로 역간된다. 이 책의 부록에선 비교문학의 역사(프랑스파)와 서지의 제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이스슈타인은 “비교문학의 본질적인 과제는 비교문학의 명칭과 그 목표를 정하는 것”이라고 보고 “비교문학은 그 학문이 성숙기에 도달하기까지가 아직 요원해, 구속을 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그는 비교문학이 독자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비교문학은 문학사 및 이론의 전문화된 한 분야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프랑스학자와 미국학자들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 르네상스의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되어 갔으며 과학혁명으로 인해 중세관이 흔들린다. 그에 따라 개인의 이성이 점점 강조되어 갔다(계몽주의) 작가들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자신들을 신고전주의라고 명칭하며, 그리스, 고전의 법칙을 준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종교전쟁으로 귀족들의 경제권이 상실되어갔고, 도시와 부르주아가 대두된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정치권력을 획득하는데 실패했고 그들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펴는 계몽군주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게 된다. 정치를 우위에 두고 있는 시대상을 반영해 지배를 용이하게 하는 절도, 조화, 이성이 미의 핵심 가치로 떠오르게 된다. 절대왕정이 꽃피워졌던 프랑스에서 고전주의 사조가 만연했고, 프랑스 문학은 유럽을 제패하고 있었다.
- (*)산업혁명으로 비인간화가 만연해져 갔다. 이러한 사회현실에 반발해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가 대두하게 된다. 낭만주의는 근대문학의 성격을 띤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낭만주의의 서두를 알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은 합리와 계몽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시자연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사적 소유 때문에 불평등이 발생했으며, 사회계약을 통해 평등한 자연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즉 루소의 자연은 문화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상상력(→로망스≠현실)을 중시한다. 국적을 떠나 개인의 내면을 중시(보편성, 세계성)하며, 시인은 천재로서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실재의 깊이를 찾는 존재라고 여긴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1770년대 폭풍노동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감정과 정열을 이성보다 높은 것으로 간주하고, 정서로 시를 표현하며, 천재는 속박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운동은 탈고전주의, 탈계몽주의적 성격을 띤다. 전 시대 문예사조에 대한 반발적 성격이 크다. 반면 프랑스는 고전주의의 사조가 너무 강해서 낭만주의가 독일보다 늦게 대두된다.
- 르네상스 시기 때, 단테가 <속어론>에서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문학 작품을 쓸 것을 주장한 걸 국민문학의 형성의 첫 기점으로 본다. 국민의식 고취와 더불어 성립된 국민문학은 낭만주의, 19C의 역사학 언어학의 급격한 발달로 그 형성이 심화된다. 하지만 서구문학의 상호 관계가 너무나 복잡해 국민문학 연구와 더불어 외국문학과의 비교연구도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다.
- 르네상스시기의 이탈리아가 배경. 공주를 사랑하는 시인 탓소와, 유능한 신하 안토니오와의 갈등을 통해 시인 자신의 언어 갈등과, 시인과 독자의 갈등을 부각시킨 작품
- 귀아르의 평가
- 쉐러의 관점
- 1300년대 이탈리아의 천재시인, ‘휴머니즘의 아버지’라 불린다. 교황청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연애시를 쓴 시인. 인간의 덧없음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낸다. 대표작으로 <여인 이오라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있다.
- 루소 이전, 이후로 나눠서 프랑스와 영문학의 교류 비교
- 1533-1592, 이성→인간미, 프랑스의 사상가, 도덕주의자
- 20년대에 신화, 전통, 문화->문학성을 재평가하려던 움직임이 40년대의 예술작품의 내재적 가치를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변화함, 심미주의로 봐도 됨.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음(반 프랑스학파적). 언어의 기능을 비평하는 움직임이 도드라짐. 문학은 과학과 철학의 언어와 대비된다고 분명히 명시한다. 과학과 철학의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장르를 구분하기 보단 내용과 형식을 종합해 문학작품을 자세히 읽으려고 한다. 아이러니, 중의, 패러독스에 높은 가치 부여. 내제연구를 강조한 해체주의에 영향을 받음, 비평의 마피아라고 불린 예일학파, 대표적 인물로 소쉬르, 니체, 하이데거를 들 수 있음. 이성의 가치를 덜 중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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