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정시집 /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임재정선생님의 첫시집이 나왔다.
문예중앙시선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임재정선생님 첫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온 지구를 누비며 스패너가 날아다니기를 바랍니다. ^^
3월 10일(토) 양작식구들과 소소한 축하자리...
임재정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문예중앙시인선
■책소개
겹눈으로 바라보는 사물들의 세계
임재정 시인의 첫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가 문예중앙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이 200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뱀」으로 등단한 이후 써 내려간 57여 편의 시를 9년 만에 묶은 작품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시집인 만큼,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다양한 주제적 프리즘을 관통한다. 삼국유사나 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인물 등이 가공되어 시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가 하면, 서정적인 자아를 착란의 형식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노동하는 존재들의 일탈을 다양한 관점으로 탐구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데에서 독자들은 겹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비의 꿈을 상상할 수 있다.
■저자소개
임재정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다. 2009년 [진주신문] 진주가을문예에「뱀」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책 속으로
1
춘천 어느 닭갈비집엔 양변기 두 개 나란한 화장실이 있죠 거기서 나는 당신 구린내를 연료로 날아오르는, 희고 둥근 엉덩이 로켓을 보았습니다만, 안녕? 그때 내가 건넨 인사는 로켓에 대한 예우였을까요 어떤 좌표를 가졌기에 우린 발사대에 마주 앉았을까요
2
왜 있잖아 그때, 네가 말하고
맞아 그런 적 있지, 끄덕이는 나를
훅- 찌르고 가는 냄새
얼굴을 찡그리면 말도 구려지드라, 나는
내일은 더 구릿해야 사는 것 같은데
네가 나사고 내가 드라이버여도, 내게 비집고 네가 박혀도 우린 함께 꿈꿀 권리의 이쪽과 저쪽, 그러나 비눗갑에 불어터진 나는 손 내민 네게서 미끄덩
완벽한 하나면서 우린 불안한 둘
다 그렇지 뭐, 쪼그리고 바투 앉아
네가 끄덕이는 내 꼴이 큼큼할까 봐
사는 게 냄새지, 얼버무리다가
먼저 일어서기 머쓱해
나란히 변기 두 개는 좀 그렇다 그치?
그러자 대뜸 큰 소리로 쏟아지는 물
아무렴!
-몹시 구릿한 로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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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을 달아 어른인
사람, 풀풀한 사람 눈사람
어제 눈 더미를 굴려
나를 뭉쳐낸 아버지, 아이야 어디 있니
나는 반듯한데 삐딱한 햇빛의 시비
집에선 그림자째 사라진 네가
대못 친 다락에서 불쑥 발견된다 해도
놀라지 않으마, 나 눈사람은
(햇빛의 스파이)
수염에서부터 서둘러 녹아내리는 꿈의 부동자세
마술을 잃은 아이는 위태롭단다, 그러므로
또 한 차례 지상을 휩쓰는 눈보라의 주문
철철 달리는 물의 철도도 구름의 바퀴도
다 같이 공존할 수 있는 곳, 다락방
아주 작은 창가에 쪼르르, 달라붙어
어이, 아버지 네 다락방에
나를 데려다주지 않겠니, 난 네 아들이니까
흘러내리는 수염을 붙잡고 물소리로, 어쨌거나 흠!
-눈사람의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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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칸트는 잘 몰라요 마구 대하면 물고 열 받은 만큼 체온이 변할 뿐이죠 스패너 말이에요 내 손바닥엔 그와 함께한 숱한 언덕과 골짜기로 가득해요 지친 날엔 함께 사촌이 사는 스페인에 갈 수도, 집시로 가벼워질 수도, 공통적으로 우린 공장 얼룩 비좁은 통풍구 따위에 예민합니다
초대합니다 나의 반려물들과 친해져보아요 틱 증세가 있는 사출기는 덩치가 커다랗지만 사춘기고요 스패너는 날렵한 몸매에 입과 항문을 구분하지 않아요 악수할까요? 융기와 침하를 거듭하는 진화론을 두 손 가득 담아드리죠
아홉 시 뉴스를 쓸어 담은 찌개가 끓어요 (패륜이란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세제로 지문에 퇴적된 기름때를 문지릅니다 무지개를 문 거품을 분명한 목소리로 무지개라 부릅니다
함께 늦은 저녁을, 숟가락에서 마른 모래가 흘러내려요 건기인가 봐요 우리를 맺어준 물결은 어제처럼 흔적뿐
몇 개의 공장 지나 강을 따라 우린 바다에 닿을까요 출항을 꿈꾸는 침대가 삐걱댑니다 마침내 스패너는 분무하는 고래가 되고 나는 검푸른 등을 타고 남태평양을 항해하는 꿈, 당겨 덮습니다
-스패너와의 저녁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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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해
내 친구 포크레인이야
천천히 혀를 말고 포-크-레-인 해봐
손잡고 돌던 멜로디를, 소녀를
황토밭을 내닫는 소나기를 만날 수도 있지
아- 알았네, 이런 얼음덩어리들 하고는
꼭 Rain이 아니면 어때, 근사하잖아
이름만으로도 설렐 친구가 있다는 거
여기저기 장지를 떠도는 일이
꺼림칙했을까, 딸꾹질은
나잇살이나 먹은 목젖을 흔들어 깨우고
목숨은 죽어서도 저마다 구근 한 알인데
소개할게, 이쪽은
꽃나무를 심고 화단을 꾸리는 미스터 포크레인
동행자, 나의 숟가락, 거대한 주걱으로 영혼의 밥그릇 다독이는 이, 일 다 마친 氏가 묘지 한쪽에 쉴 때면 합장한 품새가 좋이 명산대찰 큰스님이라니까
어허, 사람들
어깨들 풀고 인사 좀 놓으라니까
이쪽은 포크레인이야
-내 친구는 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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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방학 맞은 운동장
한 아이가 공을 차며 논다
학교 벽에 막혀 몇 겹으로 되돌아오는 공보다 큰 소리
빈 골대는 어떤 것도 간절하지 않지
공은 태연히 가장 외진 곳으로 굴러간다
-나는 날마다 5크로네 정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이와 나 사이엔 한 덩이의 진흙이 있다
그것은 치댈수록 부푸는 종교일지도 모른다
몇 개의 오븐을 지나온 창세기처럼
진흙으로부터, 라는 말은 진흙을 믿는다는 것
이단이라는 것
손가락으로부터 손목이, 이런 순서는
구강기 아이의 장난감처럼 위험하므로 울타리를 가진다
가령, 허리 굽혀 발가락을 꺼내놓는 것으로 진흙은
마침내 폭탄을 훔쳤다고 한다
그와 나와 진흙은 왜 서로를
-‘반죽’ 중에서 어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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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꿈꾸는 공구들, 공구들의 꿈
임재정 시인의 시에는 노동하는 자와 사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다. 시집의 제목부터가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한 경우”이다. 시집의 제목이 된 해당 구절이 등장하는 시 「스패너와의 저녁 식사」를 읽을 때 우리는 강철로 만들어진 스패너라는 사물이 지닌 물성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면과 맞닥뜨리게 된다.
모차르트와 칸트는 잘 몰라요 마구 대하면 물고 열 받은 만큼 체온이 변할 뿐이죠 스패너 말이에요 내 손바닥엔 그와 함께한 숱한 언덕과 골짜기로 가득해요
―「스패너와의 저녁 식사」 부분
스패너는 예술도 철학도 모른다. 다만 사나운 개처럼 거칠고, 강철로 되어 있기에 열 받은 만큼 뜨거워질(물론 식을수록 차가워지기도 할) 뿐이다. 이런 스패너와 함께하는 한 사람의 인생 또한 대개는 모차르트나 칸트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는 국외로 여행을 떠나는 대신에 스패너를 들고 기름때 낀 숱한 언덕과 골짜기로 드나든다. 물론 그들이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근사한 테이블 위에서 일어나는 낭만적인 한때가 아니고 그저 아홉 시 뉴스 같은 잡탕 재료들을 다 긁어모아 끓인 찌개가 놓인 일상일 따름이다. 이런 풍경이 펼쳐지는 시에서 말하고 있는 ‘패륜’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패륜이란 그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그를 분해할 경우이다. 이 구절은 자신이 스패너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일러줌과 동시에 사물,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스패너가 주체의 자리를 위협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이는 꿈꾸는 주체가 자아를 가진 ‘나’들에게서 사물들로 옮겨가는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사물들은 의인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유한한 생의 비극까지 껴입는다. 이러한 비극이 슬픔으로 드러나지 않고 위트와 유머로 아이러니하게 표현되는 것 또한 임재정 시의 특징이다. 아이들이 만들었지만 수염을 달아 어른인 눈사람은 빛을 받고는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눈사람에게 녹아내림은 곧 사형 선고와도 같다. 이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 눈사람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만든 아이를 ‘아버지’라 칭하며 “어이, 아버지 네 다락방에/나를 데려다주지 않겠니, 난 네 아들이니까”(「눈사람의 가계」)라고 능청스럽게 말한다. 한편 「내 친구는 정원사」라는 시의 화자는 자신의 친구 ‘포크레인’을 정원사로 소개한다. 그가 삽차를 정원사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삽차가 심고 가꾸는 꽃나무와 화단은 다름아니라 죽은 이들을 묻는 장지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시의 분위기는 무겁지 않다. 화자는 ‘포-크-레-인’이라는 친구의 이름을 잘 뜯어서 보면 “손잡고 돌던 멜로디를, 소녀를/황토밭을 내닫는 소나기를 만날 수도 있지”라고 너스레를 떨며, 죽음 앞에서 딱딱히 굳은 사람들을 보고는 “어허, 사람들/어깨들 풀고 인사 좀 놓으라니까”라고 한마디 얹기까지 한다.
노동과 친연성을 갖는 사물과 공간들, 가령 내연기관, 저탄고, 스패너, 드라이버, 롱로우즈 등등이 임재정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가 도구와 기계 들이 갖는 물성에서 생의 비밀을 발견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가령 그에게 세상은 고장 난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나는 우울해, 세상엔 고장 난 것들뿐이니/나는 모든 게 혼란스러워”「즐거운 수리공」 부분). 그래서 그는 기꺼이 공구들을 들고 고장 난 세계를 고치는 수리공이 되고자 한다.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는 수리공이 된 시인, 혹은 시인이 된 수리공의 노동 일지이자, 패륜을 저지른 공구들이 꾸는 꿈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