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는 기쁨/최호일

[최호일]외로움이 유발하는 천진한 상상력

문선정 2015. 12. 18. 11:03

외로움이 유발하는 천진한 상상력​ / 최호일 시인

  
 지난 2009년 《현대시학》 신인작품공모로 등단한 최호일 시인의 첫 시집『바나나의 웃음』. 이 책은 갸우뚱한 감정을 향한 여행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이미 익숙한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향해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작별을 고한다. 낯설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엉뚱하고 또 경쾌한 시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바나나의 웃음』은 갸우뚱한 감정을 향한 여행으로 가득하다. 시인은 이미 익숙한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향해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작별을 고한다. 이를테면 옆에 있는 당신과 내 발에 익은 이 거리와 잠시 헤어지기 위해 떠나는 길. 황당하게도 그 길은 ‘콜라를 사기 위해 먼 아프리카로 가는 길’이다. 또는 오렌지들이 사는 오렌지 나라로 가는 일이다. 돈키호테 같은 황당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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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전기톱으로 자를 때 발생하는 불꽃에 대한 응시

 

 

                                                              최서진(시인)

  

 

 

                                      나는 그대가 보다 용이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존재하는 것 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그대를 세계의 한복판에 위치시켰다. 나는 그대가 스스로 형체

                                      를 갖추고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도록 그대를 천상적 존재도 지상적 존재

                                      도 아닌 존재로 창조했다.

                                                           지오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위대한 인간에게 부침

 

  1. 바나나로 세계를 나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구멍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손이 구멍처럼 어두워지고 두려워진다. 어둡고 둥근 것이 우주라면 손이 내 몸을 떠났다. 그곳에 두고 온 것 같다” (최호일)는 ‘시인의 말’처럼 혼란스런 이 세계의 내면에 손을 넣어 보는 일을 통해 『바나나의 웃음』이 태어난다. 절벽 끝에서 분신과도 같은 자식을 미는 참혹한 언어의 색깔, 열손가락 끝에서 언어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도달한 언어미학의 드라마이다. 최호일은 언어의 美를 통하여 진정한 본질의 세계를 추구한다. 특히 ‘시적 언어’를 통하여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나나’의 발화 속에서 존재감과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느껴지는 순간, 그 빈 허공에서 언어와 시간이 무수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물을 만난 물고기의 작동처럼 새로운 언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가슴에 뛴다.

 

  바나나를 오전과 오후로 나눈다

 

  바나나를 밤과 낮으로 나눈다

 

  바나나를 동쪽과 서쪽으로, 만남과 사소한 이별로, 여자의

  저녁과 남자로

 

  나눈다

 

  바나나를 세계로 나눈다

 

  불안해지는 바나나

 

  드디어 생선이 되는 바나나

 

  왼쪽 바나나가 사라지고

 

  바나나의 미래가 사라졌다

 

  아 바나나하고 웃는 바나나

 

  바나나

 

  네가 있는 곳을 알려줘

  -「바나나의 웃음」전문

 

  “바나나”를 나누는 것은 누구인가? “바나나를 오전과 오후로 나누”고, “밤과 낮”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만남과 사소한 이별”로, “여자의 저녁과 남자”로 나눈다. 온전히 바나나(존재)로 살 수 없는 이 시대의 혼란스럽고 극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는 타인들의 잣대로 끊임없이 나뉘는 존재들이다. 악몽처럼 온전히 ‘나’로 설 수 없는 치욕의 날들을 언어를 통해 감각해, 재생산해 내고 있다. 타자가 그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대상은 이미 그것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언어’를 통하여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들이어서 그때마다 다른 상태로 존재한다. 바나나(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릴까 불안해진다. “생선”이 되고, “왼쪽 바나나는 사라지고” 급기야 “바나나의 미래”가 사라진다. 그 순간 존재는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절규한다. “네가 있는 곳을 알려줘”라는 시적 발화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몸짓으로 구체화된다. 진정으로 우리가 구원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최호일은 언어의 의미를 통해 진정한 바나나(존재)의 세계를 추구한다. 이것은 시적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언어’를 통하여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하고 있다.

 

  커다란 손바닥을 치운 것처럼

  당신과 내 눈 사이에는 코발트블루가 있다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그곳에 오래 빠져 죽고 싶은 색깔이 산다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

 

  이런 색이 있어 행복하지?

  아냐,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야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없이 긴 생각처럼

 

  눈이 한 개씩 더 있는 날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가장 먼 길을 돌아서

  물방울을 닦고 한쪽 눈이 없는 색처럼

  - 「코발트블루」전문

 

  ‘코발트블루’라는 언어로서 명명되는 세계를 통해 ‘코발트블루’라는 색이 가져다주는 인식을 통해 ‘당신’과의 사랑을 환기시킨다.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색,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녹색의 물기가 섞여 있는 이 아름다운 청색은 “오래 빠져 죽고 싶은” 색이다. 그는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색”이라고 발설한다. 행간을 바꿔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색”이라고 한정한다. 바다가 아무리 높게 차올라도 사람의 가슴을 뛰어 넘을까? ‘코발트 블루’는 잡히지 않는 사랑의 세계를 실체 이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시에서는 한가지의 색깔을 집요하게 몸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주체의 언어가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로 유인시키고 있다. “이런 색이 있어 행복하”다 라는 주체의 생각이 드디어 ‘코발트 블루’의 세계에 도달하게 하는 전략 같은 것. 그러나 사랑은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쉽다. 또한 “눈이 한 개씩 더 있는 날”은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충분히 어두워져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진다. 그것은 깨지기 쉬운 사랑의 감정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시인은 사랑을 갈망하면서 쉽게 어긋나는 사랑의 속성을 형상화 한다.

 

  약속 때문에 바다에 간다

  약속 때문에 삼십 개의 사과가 호두나무에 열리고 전쟁이

  터지고

  조용한 저녁이 된다

 

  약속이 있어 겨울과 까만 구두를 만드는 중이야

   깊은 밤과 삼백 가지의 기분을 만드는 중이야

  이것은 사과다

 

  구름과 비와 해가 헤어진다 

  - 「아주 오래된 약속」부분

 

  위의 시는 ‘약속’이라는 언어의 속성을 통하여 다양한 의미를 산출한다. 김춘수는 시작품을 해석하는 입장의 두 가지 경우로서 ‘이미지 자체를 감상하는 경우’와 ‘그 배후에 있는 사상과 관념을 파악하려는 경우’로 나누고 있다. 그는 이것에 대하여 각각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묘사적’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또한 ‘심리적인 어떤 상태의 유추로서 쓰이는 것’을 ‘서술적’이라고 하였다. 김춘수가 비유적 이미지를 배제하고 서술적 이미지라고 한 것은 심리 묘사적인 것을 지향한다. 즉 김춘수는 서술적 이미지가 현실의 법칙이 아닌 심리나 환상의 법칙을 드러내는 방식, 기의로부터 미끄러진 기표들의 떠다님을 무의미로서 나타내는 방식을 만드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최호일의 시는 현대시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독특한 시의 영역을 보여준 경우에 해당한다. 시 문장에서 기표나 기의적 측면에 몰두하지 않고 동시에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심리나 환상의 법칙을 드러내는 “아주 오래된 약속”은 심리적 장면의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약속 때문에 바다”에 가는 것과 “삼십 개의 사과가 호두나무에 열리고 전쟁이 터지는 것”은 장면이나 심리의 묘사를 중심으로 한 이미지 이다. “약속이 있어 겨울과 까만구두”와 “깊은 밤”과 “삼백 가지의 기분을 만드는 중”이다. 최호일은 「아주 오래된 약속」에 나타난 그러한 무의식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의식적인 단계에 의한 노력을 보여준다. 또한 심리 묘사적인 이미지를 구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약속의 보편성을 획득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라일락 향기가 무작정 공중으로 흩어질 때 아니,

  공중으로 흩어진다는 말이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좋았을 때

  나는 그것을 봄과 혼동하기로 했다

  우리 결혼해도 될까요 국문과 선배에게

  문학적으로

  어제 산 장난감처럼 꺼냈다 그 말은

  한쪽 무릎이 잘린 채 골목길을 비관적으로 걸어갔다

  흩어지고 내렸다

  검은 고양이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오는

  것처럼

  그 계절의 비가 왔다

  젖은 옷과 젖은 옷 사이

  흑백으로 된 라일락 냄새가 봄의 겨드랑이에서 풍겼다

  혁명을 꿈꾸기도 했으나 불길한 색상 때문에

  머리가 가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말은 어디로 갔을가

  오후 다섯시에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시간은

  녹슬어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같이

  문득 활짝 열리는 그 말은

 

  잃어버린 지갑을 또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았다

  가장 먼 곳에 두고 살았다

  그 말이 몸에서 흩어지는 걸 본 최후의 사람처럼

  - 「흩어진 말」전문 

 

  위 시에서는 다양한 장면들이 만나서 겹쳐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라일락 향기가 무작정 공중으로 흩어지”는 장면과 국문과 선배에게 문학적으로 프로포즈를 했다가 “한쪽 무릎이 잘린 채 골목길을 비관적으로 걸어가는” 장면과 “검은 고양이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오는 것처럼 비가 내리는” 장면이 있다. 이런 심리적인 묘사의 장면들은「흩어진 말」의 막연한 ‘비애’의 의미를 생산한다. “젖은 옷과 젖은 옷 사이/ 흑백으로 된 라일락 냄새가 봄의 겨드랑이에서 풍겼”다는 문맥을 통해서 또 새로운 시적 의미를 발생시킨다. 즉 “불길한 색상”으로 표상되는 슬픔과 절망의 분위기를 추측하게 된다.

  “잃어버린 지갑을 또 잃어버린 것처럼” 이나 “그 말이 몸에서 흩어지는 걸 본 최후의 사람처럼”은 시 안에서 환기하는 울림의 효과를 노린 측면이 있다.

 

  수수꽃다리를 발음하면 수수꽃다리와

 

  수수와 꽃과

 

  다리가 떠오른다 누구의 다리인지 성냥을 켰는지

 

  움직이는 지네의 두뇌보다 더 많은 다리들

 

  만져본 적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들

 

  계단을 오르면 있는 다리들

 

  나는 너무 늦거나 바빠서 너를 보지 못하네

 

  수수와 꽃과 다리를 다 보지 못하네

 

  힘차게 라면이 불어서 터지고 있다

 

  여기는 입이 없는 세계구나

 

  수수꽃다리가 수수와 꽃과 다리가 되지 않으려고

 

  잠깐 말을 멈추고 있다

  - 「수수와 꽃과 다리」전문

 

  최호일의 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언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미학의 세계이다. 그 중에서도「수수와 꽃과 다리」는 의미의 양상들이 다양한 감각의 형태와 결부되어 나타나곤 한다.

  “수수꽃다리를 발음하면 수수꽃다리와 / 수수와 꽃과 / 다리가 떠오른다 ”는 것. “만져본 적이 있는 다리와 없는 다리들”과 “계단을 오르면 있는 다리들”이 파편적으로 나열된다. 특별한 구체적인 내용항이 없이도 시편들이 내면의 깊이를 형상화 한다. 주체는 “너무 늦거나 바빠서 너를 보지 못한” 존재이다. “수수와 꽃과 다리를 다 보지 못하는” 슬픈 존재이다. “라면이 불어 터지고” 있어도 라면을 먹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이다. “수수꽃다리”가 “수수” 와 “꽃”과 “다리”로 분리 되지 않으려는 주체의 아픔이 전달된다. 이들의 내면적인 방향, 다시 말하면 ‘우울’과 ‘슬픔’과 ‘절망’의 방향이다. 이러한 내면세계의 강조는 시인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 시적 언어가 온 몸에 퍼지는 순간이 가장 열정적인 위로다. 두렵고 지루한 우리들의 삶에서 “잠깐 말을 멈추고”고 있는 말을 본다.

 

 

  2. 시간의 시각화를 통한 허기와 갈증

 

  인간의 모든 지각 활동이 공간 속에서 발생하며 시간의 자상한 지배를 받는다. 문학이 존재에 대한 해명이라거나 삶에 대한 탐구이며 진리를 인식하는 행위라고 규정할 때, 그것은 시간에 접근하는 방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실타래처럼 맺고 있다. 삶은 시간 속에서 존속되며 시간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시인의 시간 의식은 ‘시적 지향’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지향된 시간을 파악하는 것이 작가정신을 파악하는 방법일 수 있는 것은 모든 문학작품의 생성이 의식의 지향성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기존의 시간적 개념을 부수어 버리고 시적 주체의 시간성을 확보한 것을 목도하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그 시간의 무화(포에지의 시간)로부터 생성되는 뜨거운 열기와 빛에 눈이 데이기도 하는 것이다.

 

  비가 그친 줄 모르고

  일 분 동안 쓰고 걸어간 우산을 음악이라 하자

  검은 우산의 딸처럼

  우산을 접으면 주르륵 흐르는

  첫 번째 가로수의 두 번째 전생과 검은 발자국 소리

  꽃의 노란색 바깥이라고 부르자

  불가능한 저쪽이 따라온다

 

  나뭇가지 사이에 스무 살 적의 새와 서른 살의 젖은 새가

  새가 되기 위해 앉아있다

  나는 늘 없고 내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너를 이해해

 

  가로수가 넘어지고

  놀이터에서는 수많은 공이 사라진다

  대부분의 현재는 발바닥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아주 잊어버리자

  삼천 년 후의 목요일이 도착할 것이다

 

  비와 시간으로 깎아 만득 식탁 위에

  음료수가 놓여있고 누가 입술을 놓고 갔다

  머리핀을 꽂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우산이 생겼다

  - 「일 분 동안 우산 」전문  

  시간이 삶이라면 시간이 사람이라면 그 존재하는 세계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시인은 홀연 자신의 사명을 이해하고 고독한 놀이를 시작하게 된다. 시간의 재생은 가능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은 반드시 한 번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순간, 그것은 이미 고독한 것이다. 시간은 고독한 순간으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를 이루는 질료들이 저마다의 추억을 끌고 미래에서 과거로 비상하는 것을 바라본다.“비가 그친 줄 모르고 / 일 분 동안 쓰고 걸어간 우산을 음악이라 하자”주체가 문득 비가 그친 시간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다.“우산을 접으면 주르륵 흐르는 / 첫 번째 가로수의 두 번째 전생과 검은 발자국 소리”마치 음악소리처럼 가로수의 두 번째 전생이 나타난다. 그리하여“불가능한 저쪽이 따라온다”가난하고 외롭던 가로수의 겨울.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린다. 가지마다 낱낱이 눈물의 불꽃을 달고 서로의 벗은 등을 쓸어주던 사랑의 밀어들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나뭇가지 사이에 스무 살 적의 새와 서른 살의 젖은 새가 / 새가 되기 위해 앉아있다”

  최호일은 시 한편에 여러 시간들을 감쪽같이 섞는다. 지나간 청춘의 시간을 그려 보이는 것 같다가도 10년을 훌쩍 넘은 다른 시간을 그려 보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다. 어쩌면 동시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눈을 돌리는 순간“스무 살 적의 새와 서른 살의 젖은 새가 앉아 있는 것”이다. “일 분 동안”잃어버린 시간을 통해“삼천년 후의”시간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삶이라는 것은 여러 행위의 비연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시간은 잠재적인 것의 세계를 늘 품고 있다. 시인은 분실된 시간, 망각의 시간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른다. 서로를 멀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결합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서이다.

 

  죽어서 사탕이 된 여자같이

  어느 페이지를 찢어 벽에 걸어놓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입속에 넣고 싶은 시간도 있다

 

  이것은 구름만 한 무늬의 단순하고 가장 먼 부분

  고요한 바늘이 내려와 눈썹을 찌를 때

 

  잠깐 졸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잠을 줍는 것처럼

 

  레깅스 입은 여자의 발목을 보네

  점점 위로 더 굵은 쪽으로, 그래서 붉은 곳 위로 올라가면

  우리는 너무 많은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고

 

  창밖이 있고 구름이 있다

 

  여기는 잠인가 여자인가

 

  뒤꿈치를 잠시 들고

 

  하얀 손이 모르고 놓고 간 손가락같이

  뇌는 아직 반죽이 덜 된 밀가루처럼 형체가 사라진다 시간의

 손목이

  물에 풀어져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 「하얀 손이 놓고 간 것」전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한 지각은 주체적 자아의 인식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즉, 주체적 자아의 시간을 파악하려는 의지 또는 대상 파악으로서의 인식 작용을 거쳐야 시간이 파악되는 것이다. 요컨대 ‘시간 의식’은 일종의 인식 작용이다. 시에서의 시간 재현은 사실주의적 재현이 아닌 허구적 창조의 양상을 보인다. 최호일 시의 ‘시간 인식’ 또한 창조적으로 재구성된다. “어느 페이지를 찢어 벽에 걸어놓고 싶은 시간이 있다”와 체념의 얼굴로 “입속에 넣고 싶은 시간도” 있는 폐허의 풍경들이 다정하다. 주체가 살아냈던 흔적들을 되돌아 볼 때 “고요한 바늘이 내려와 눈썹을” 찌른다. 어떤 방향으로 쇠락해 가는 시간들 속에서 열렬했던 시간을 그려보는 것은 사랑을 비워낸 자리를 확인하는 일처럼 쓸쓸한 풍경이 된다. “잠깐 졸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잠을 줍는 것처럼” 아름다운 거짓말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고”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

  삶은 시간의 주머니들로 가득하다. 모두 떠나간 운동장에 안타깝고 어리석게 서서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얀 손이 모르고 놓고 간 손가락”을 꼭 쥐고 있다. 구름 같이 흩어질 꿈들이 낡은 의자에 잠시 와 머문다.

 

  너는 밤과 동일하구나 고개를 들어 우리는 학자처럼 바라

 본다 다른 나라의 기이한 서적을 읽듯

 

  인생이 명료해지도록

 

  천 개의 단어를 넣고 뚜껑을 닫아놓은 나무상자처럼 그것을

  다시 뒤적이는 손처럼

  잠을 커피에 찍어 먹는다

 

  빛을 어둡고 축축하게 보관한다 너는 태어나다 죽은 아이

의 얼굴을 달고 있구나

  먹다 남긴 과자 봉지 속에는 지나간 시간이 들어 있을까

 

  야구 선수들은 정말 베이스를 지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

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 구멍 사이로 밤이 온다 어둠을 빛의

오른쪽 얼굴로 이해한다

 

  나로부터 한없이 늘어나는 것이 너는 밤보다 조금 더 길게

  어두워지고 있다 몸에 들어온 조용한 고무줄같이

  - 「민달팽이」전문

 

  「민달팽이」를 따라가는 사이에 문득 시간이 지나고 있다는 느낌마저 사라져 버린다. 민달팽이의 느린 걸음을 따라가다 뒤돌아보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실뿐이다. 돌아가기에는 이미 멀리 와 있고 날은 어두워졌다. “너는 밤과 동일하구나”라는 첫 시작은 우리의 삶과 내내 이어질 삶의 어둠에 대한 통찰이라서 조금 눈물겹다. “인생이 명료해지도록” 우리는 자주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 시가 그리고 있는 것은 “먹다 남은 과자 봉지 속에 지나간 시간”과 “야구 선수들이 베이스를 지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를 지나가는 시간을 가장 담담하고 절박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런 질문을 던지면 그 구멍 사이로 밤이 ” 온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어떤 날카로운 비극을 환기 시킨다.

 

  『바나나의 웃음』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면 “토마토 같은 것이 붉게 터진다 마야의 손에서”( 시「마야」) 최호일 시집은 무수한 언어유희를 통해 미학적으로 우주를 재구성 시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시편들에 깃든 이상한 시간을 따라가면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기분이 된다. 장미가 가득 핀 정원에서 감각으로 사유하는 희귀종의 나비를 만난 듯 눈이 커진다. 그의 시집을 읽고 나면 언어의 감각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물체에 손을 베인 것 같다. 그 이상한 감정으로 직조한 단면의 무늬들을, 시간의 잔해들을 속수무책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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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일 시인

 

 1958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2009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바나나의 웃음』(문예중앙, 2014)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