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정]무늬들
무늬들
문선정
장마철 태풍을 동반한 집중호우가 저녁 무렵부터 시작될 거라는 속보가 나오는 시간, 잠깐이지만 모습을 드러낸 오후 세시의 하늘이 꼭 스무 살 처녀의 얼굴 같이 푸르다. 푸른 얼굴을 보는 이의 마음도 반짝반짝 빛이 나겠다. 눅눅함을 말리기 위해 활짝 문을 열고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젖은 잠을 자고 있던 먼지들이 청소기 속으로 줄지어 걸어가는 사이 거대한 먹구름이 푸른 하늘을 덮어버렸다. 어둑해진 틈새로 무언가 스미어 들까 싶어 다급히 문을 닫았다. 말갛던 하늘의 얼굴을 잠시 생각하다 옷자락에 숨어 지내던 먼지를 발등에 털었다. 순간 내 신체 내에 연결 되어있는 선 하나가 끊어져 정전이라도 된 듯 소파에 몸을 쓰러뜨렸다. 애인 같은 소파가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아 잠으로 빠져들기도 하는데, 잠 속에서의 나는 늘 어디를 간다.
그곳에서는 옛 집이 지금 사는 집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골목 끝이 집이고 시장이고 미장원이고 산이고 냇가다. 골목의 이곳저곳을 더듬고 다니며 자전거를 탄 아버지의 허리를 꼭 안고 달리는 여자 애의 모습을 엿보기도 하고, 물뱀이 사는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12살 여자 애를 말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미장원에서 웃고 떠들기도 했다. 또 버스에서 내렸을 때 정류장에서 이불을 들고 서 있는 아버지를 만난다.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이 없는 아버지. 변종의 골목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해매고 있을 때 아버지를 닮은 사람에 이끌리어 골목 끄트머리 집 파란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갛게 쓸려져 있는 마당에 들어선다. 지금 쓰고 있는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우리 집이라는 것임을 알아채는 순간, 아버지를 닮은 사람은 어디로 갔지? 아버지를 닮은 사람은 분명 아버지 일거야.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나는 골목을 빠져 나와 소파에 도착해 있다. 이렇듯 이따금씩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 꿈속에 등장을 한다. 꿈속 골목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언제나 그랬듯이 허기가 발동한다.
저녁이 되기 전에 어두워진 창문 앞에선 굵은 빗방울들의 아우성이다. 나는 다시 잠속에서 놓쳐버린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로 한다. 어디 나의 자잘한 그리움의 무늬가 생전 아버지의 무늬만 할까.
북쪽이 고향인 아버지는 핑계 삼아 약주를 즐겨하셨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끝까지 상투머리를 자르지 않고 서당을 운영하고 훈장을 지냈다는 아버지의 아버지는 글공부를 하는 선비였으며 곡식창고엔 쌀가마니를 꽤 높이 쌓아놓고 살던 집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1.4후퇴 때 남하 하는 피난길에 나섰다 자칫 잘못 하다가는 일가족이 변을 당할 지도 모르겠기에, 갈림 길이 나오자 가족 수를 나누어 떠나기로 나름 머리를 짜내었다는 이야기. 아홉 형제 중 셋째였던 아버지만 평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을 따라 무사히 남하했다는 이야기. 나머지 형제들은 부모님과 친척들과 나뉘어져 장소를 정하여 만나기로 했었는데 아무도 그 자리에 나오는 가족이 없어 망연자실 했다는 이야기. 험한 길을 무사히 넘어온 목사님은 대구 어딘가로 아버지를 데리고 가려고 했으나 끝내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군에 입대를 하면 혹시라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는 이야기. 제대를 한 후 부대 옆 교회에서 직업을 구했지만, 만남의 장소였던 비무장 지대를 바라보기만 했던 이야기들…… . 이런 이야기들이 아버지 삶에 그려진 무늬였다. 푸르던 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했던 무늬는 선명한 화석이 되어 아버지의 예민한 감성을 무한정 괴롭혔을 것이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쪽에서 천생배필인 어머니를 만나 살뜰한 마음으로 우리 4남매를 챙기는 모습 또한 남달랐다는 이유도 그것일거라고 이웃들은 어머니를 살짝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 마음 어련하고 오죽했을까 싶다. 그러나 명절을 전후로 평상 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시곤 했던 아버지에게로 나는 와락 달려들어 놀아 달라고 들러붙어 생떼를 부려도 보았지만, 울음을 삼키는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슬그머니 물러나야 했다. 한 사나흘 향수병을 앓다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상한 모습으로 돌아와 우리의 손톱 발톱을 잘라주고 저녁밥상을 물리고 나면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스무 살이었던 초여름 날. 아버지가 TV에 나왔다. 1.4후퇴 때 헤어진 가족을 찾는다는 피켓을 들은 아버지의 긴장된 표정이 화면에 채워졌다. 아버지는 가늘고 긴 일자 입술을 꼭 깨물고 부모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는 가여운 모습이었다. 잠시 후 TV는 인심 쓰듯, 초조하게 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디요? 누구요? 집에서 전화기를 지키고 있던 나는 TV 앞으로 바짝 다가갔으나, 그 후 아버지가 가족을 부둥켜안고 우는 일은 끝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방송국 너른 주변에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연들은 강렬한 햇빛 아래서도 최대한 오래 버티었고, 한 계절을 버티지 못한 아버지의 남루한 사연은 빛에 발하고 바람에 찢겨진 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버지의 설렘이 가라앉은 어느 날 방송국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버지의 6촌 형이 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친척이 처음으로 생기는 날은 집안에 처음 벌어진 잔칫날이었다. 어머니에게는 하루 사이에 시댁식구가 생겼으며 우리는 처음으로 불러보는 “큰아버지” “큰엄마”라는 말이 신기해서 자꾸자꾸 입에 올렸다. 명절이면 함께 지낼 수 있는 “큰집”과 “작은집” 식구들이 서로 오고갔고, 6촌 보다 조금 더 먼 고모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까지 생겼으니 일 년이면 두어 번 씩 도지는 아버지의 고약한 향수병도 사라졌다.
아버지의 팍팍했던 삶에 따뜻한 해후도 잠시 2년 후, 우리의 “6촌 큰아버지”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마저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지금도 가끔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을 보면 아버지의 고향이 평안남도 숙천 어디쯤이라는 것, 어쩌면 아버지의 형제 중 단 한 명이라도 북쪽 마을 어디 즈음에 계시지 않을까. 성경을 읽어주던, 노래를 불러주던, 손톱을 잘라주고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아버지가 아직도 계신다면, 나라도 다시 한 번 절절한 사연을 풀어낼 수 있을 텐데. 평생을 그리움의 무늬만 새기다 가신 아버지의 호흡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
병과 친구가 되어 동거를 시작한 나는 웬만한 일로는 크게 놀라지도 반응도 않는다. 사람의 일로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허기져야 하는 일들이 수두룩하지만, 마음 한 쪽 내려놓고 멀리서 바라보면 지극히 사소한 일에 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혹여 사소하게 넘겨버려야 할 고민거리에 잠시 동요될지라도 금세 머리를 흔들고 털어내 버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슬픈 무늬가 내게로 스미어 든 것 같은 느끼는 것은, 가장 돈독하게 지냈던 형제 중 한 명과의 우애가 어느 날 갑자기 틀어져 남남처럼 지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면 큰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칠 일이지만, 이 또한 생의 고난 중 일부일 것이라 여긴다. 고난은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고, 해결 방법 또한 지고 가든 풀고 가든 움직이며 호흡하는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결코 놓아버릴 수 없이 품고 살았을 생전 아버지의 슬픈 무늬 또한 고난의 일부였을 테니까.
내게 있는 무늬가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지금 이 순간. 아버지의 슬픈 무늬를 똑 닮은 것 같아 마음 구석에서 쓴물이 오른다. 잠 속 골목길에서 소식 끊어진 내 형제와의 느닷없는 만남은 또 어떤 의미일까. 내 뒤를 말없이 따라오기만 하다가, 웃기만 하면서 내 표정을 살피는 듯하다가, 또 어떤 때는 웃으며 말을 건네기도 하고, 무언가를 주고 급하게 골목을 빠져나가기도 한다. 어쩌면 아버지의 무늬를 형제와 나 골고루 나누어 닮은 거라면, 우리 또한 그리움의 무늬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 한 구석이 짠한데,
"구릉구릉 구르릉 쾅쾅……."
저녁이 되자 태풍이 지척에 왔나 보다. 성큼 다가온 어둠의 중심에서 비바람도 심하게 들고 날뛰는 중이다. 저렇듯 거친 바람을 맞고서도 멸망하지 않으려는 나무들이 가느다란 허공을 더듬으며 버티고 있다. 요란한 세상에서 더 요란하게 흔들리며 이번에도 반드시 살아남아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 나무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나는 여전히 사사로운 무늬를 꺼내어 만지작거리고 있다.
달 밝은 밤에 무늬를 꺼내어 보고 남모르게 어깨를 들먹이던 아버지처럼, 나는 지금 몹시 아프다. 빨리 태풍도 장마도 다 지나가고 이 자리에 해의 살이 다시 도톰하게 피어오르련만. 그러면 내게 있는 무늬에 금방이라도 꽃이 피우련만.
20120719
<이수동님 그림 - 해후. 2008>
이수동은 이야기꾼이다.
그의 그림은 이야기 그림이다.
따라서 그림책을 보듯 바라보아야 한다.
인상적으로 얘기하자면 따뜻하고 아름답고 애잔한 내용들이 깔끔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이미지를 단어 삼아 내밀한 연서를 쓰고 기억과 추억을 시각화하며 무엇보다도 이수동의 이 이야기 그림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인성과 정서에 겨냥되어 있다. 그의 그림 안에는 동양의 자연 친화적 사상과 인간과 자연의 동일한 유기적 존재감으로서의 연대감이 충만하고 식물적 상상력이 무성하다. 아울러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성으로서의 '연애'와 사랑, 이성에 대한 애틋한 연정과 함께 삶의 고독과 스산함, 이별과 소멸 등도 비처럼 스며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