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정 2011. 2. 8. 21:52

  - 혼효림

 

 

 

 

                                                                                                                                                     목성균

 

 

 

 

 

   우리 나라의 산을 지키는 나무를 대별하면 소나무와 참나무로 나눌 수 있다. 사람들은 언필칭 소나무는 선비에, 참나무는 상민에 비유한다. 그러나 두 나무를 우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 참나무는 참나무, 각기 개성적인 장단점을 타고난 대등(對等)한 나무다.

   물론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자질(資質)이 우수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건축용 재목으로서 소나무의 자질은 탁월하다. 그래서 경복궁, 남대문 문루, 부석사 무량수전 등 국보급 목조건물은 물론 화전민의 너와집에 이르기까지 집 재목은 다 소나무가 차지했다

   소나무는 도편수의 의중(意中)을 잘 받든다. 제 몸뚱이에 들이대는 대패질이나 끌질에 반항하는 법이 없다. 마름질과 다듬질 하기가 쉬운 연목(軟木)인 데 비해 오랜 세월 동안 축조미(築造美)를 유지한다.

   참나무는 대패질도 허락지 않고 못도 받아들이지 않는 견목(堅木)이면서 부식(腐蝕)은 소나무보다 빠르다. 참나무는 재목의 자질을 지니지 못했다. 국보급 궁궐이나 절, 집은 물론이고 화전민의 너와집도 못 짓는다.

   그런데 참나무가 없으면 소나무도 쓸모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논 삶는 써레의 몸체는 소나무인데 이빨은 참나무다. 이빨이 단단해야 논바닥의 흙덩이를 으깨서 어린 모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곤죽처럼 삶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목화씨를 바르는 씨아도 몸체는 소나무지만 가락은 참나무다. 씨아의 가락은 아래 위 한 쌍이 맞물려 압착(壓着)하는 힘으로 목화씨를 바른다. 그 압착의 축을 이루는 가락의 귀는 당연히 쇠처럼 야물어야 한다. 그래서 씨아의 가락은 참나무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참나무의 쓰임새가 꼭 가혹한 감당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대접받는 쓰임새도 있다. 그 유명한 평북 박천의 반닫이는 참나무로 만든다. 내당마님의 손길에 반들반들 길들여진 박천 반닫이가 대갓집 안방 윗목에 화류장롱과 더불어 묵직하게 좌청하고 있다면 그 집의 가세는 요지부동한 것이다. 반닫이의 용도가 주로 비단피륙이나 금은 보화를 담아 두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가세를 보관하는 가구재는 당연히 무겁고 견고한 질감의 나무라야 한다.

   참나무는 동양에서보다 서양에서 더 대접을 받는다. 저 유명한 '보르도 와인'은 반드시 참나무통에 담는다. 갓 거른 새 술은 탁하고 맛이 없는데 참나무통에 담아 숙성시키면 비로소 달고 향기로운 '보르도 와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목질의 담백성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포도주 안주에 제격인 훈제(燻製) 고기는 반드시 참나무를 태운 연기를 쏘여서 만든다. 수지(樹脂)가 타는 글음이 없는 담백한 연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나무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천만에, 소나무의 자질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다 해도 훈제용 연기를 낼 수는 없다. 송진 때문이다. 소나무는 송진이 지글지글 끓으며 기름지게 타서 연기가 담백하지 못하다.

   연소(燃燒 )의 담백성! 그러고 보니 고승의 다비식(茶毘式)이 연상된다. 사람의 주검들도 태우면 생애의 탐욕 정도만치 글음이 더 나고 덜 날 것이다. 채식으로 고행을 하다가 열반에 드신 선승(禪僧)의 주검을 태우면 맑고 담백하게 연소한다면, 호의호식하던 모리배나 탐관오리의 기름진 주검을 태우면 욕심만치나 글음이 충천할 것이다. 참나무가 타는 것은 사리(舍利) 몇 과(果)를 남기고 홀연히 연소하는 선승의 다비와 같다. 참나무가 우수한 훈제를 만들 수 있다는 단적 설명이다.

   그러나 참나무의 담백한 연소는 도자기를 굽는 데는 쓸모가 없다. 도자기를 굽는 데는 소나무 장작이라야 한다. 송진이 타는 끈질긴 화력이라야 맑고 깊은 자기의 빛깔을 내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천년을 가는 것 역시 송진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너나없이 소나무만 편애(偏愛)해 온 것은 사실 그 자질 때문이 아니고 수격(樹格) 때문이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우리의 기상이라고 애국가에서도 예찬을 했듯이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기품이 높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참나무가 백중판의 상민들 같다면 소나무는 정자 위에 앉아서, 또는 탁족(濯足)을 하면서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선비 같다. 그래서 소나무를 시인들은 예찬하고 묵객들은 그렸다. 소나무는 중국의 신선사상인 십장생(十長生)에도 들었고, 우리 나라의 선비정신인 오청(五淸)에도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이(李珥)의 세한삼우(歲寒三友) 중 하나이고, 윤선도의 다섯 벗 중 하나다.

   그렇다면 소나무 단순림(單純林)은 수격의 합산만치 우수해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미끈하게 잘 자란 춘양목(春陽木) 우양림에서도 사관생도의 열병식장 같은 정연한 질서 외에 달리 우수한 수격의 집단체재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하물며 중부지방의 송충이가 덤벼든 꾸부정이 소나무 불량임지는 말할 것도 없다. 열악한 환경에서 저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나무들의 반목과 질시가 파당을 일삼던 조선시대의 선비 집단같이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참나무 단순림이 소나무 단순림보다 더 보기 좋다는 말은 아니다. 참나무 단순림은 볼품없는 궁색이다.

   숲은 모름지기 혼효림(混淆林)이라야 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격의 없이 모여 서 있을 때, 비로소 우수한 숲의 사회상(社會相)을 보여 준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로의 수격을 존중하는 돈독한 모습은 오월의 숲에 주의를 기울이면 보인다.

   우리 동네 앞산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군데군데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혼효림이다. 소만(小滿) 무렵,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멍청하게 산을 건너다보면 깜짝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월의 훈풍이 누런 보리밭을 물결 지우며 건너가서 숲을 흔들었다. 바람이 숲을 위해서 부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시절을 만난, 난 바람이다. 녹음이 우거진 골짜기에 바람이 몸을 뒤섞였다. 참나무들이 환하게 활개춤을 추었다. 음양의 조화 속 같은 질탕한 숲. 이파리를 하얗게 뒤집으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참나무들의 기탄없는 춤사위, 기품을 도외시한 나무들의 참을 수 없음이 사내들의 희열 같아 보였다. 물론 예술성을 풍기는 춤사위는 아니다. 그렇다고 경망스러운 초라니의 춤사위도 아니다. 신명에 겨워 온몸을 다 휘두르는 사내의 커다란 막춤이다. 그때 소나무들의 태도는 어떤가. 고절스럽고 우아한 기품을 유지하기 위해서 참나무들의 군무(君舞)를 외면하고 독야청청할까, 그러면 숲은 얼마나 극명한 이분법적(二分法的) 사회상을 보일 것인가.

   그러나 소나무는 참나무들의 군무를 보고 은근슬쩍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격 높은 나무답지 못하게 '깔- 깔- 깔'거리지는 않고, 가급적 점잖은 체통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미소처럼 노랗게 송홧가루를 풍기며 굼실굼실 한량무 한 사위를 추어 보이는 것이다. 참나무들의 신명에 의도적으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소나무의 파격, 그 파격이 소나무의 고절스러운 수격을 손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한 차원 높은 수격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고절스러운 기품에다 소탈한 일면까지를 보여주었다. 소나무의 우수한 사회적 호환성(互換性)이 과연 자질과 수격이 높긴 높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임학(林學)에서는 소나무든 참나무든 혼효비율이 75%면 혼효림이라고 한다. 그러나 숲의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우수한 숲의 모습은 75%를 참나무가 차지하고 나머지 25%만 소나무가 차지하는 혼효림일 때다. 참나무에 대한 편견이 아니라, 우수한 것은 적어야 귀한 이치를 소나무에 두고 하는 말이다.

   어디 우리 동네 앞산뿐이랴. 오월에 '권금성'에 올라서 훈풍에 춤추는 설악산의 숲을 보든지, 주문진 쪽에서 '진고개'를 넘어오다 차를 멈추고 소금강 산자락을 뒤돌아보든지,  '문장대'에 올라 속리산을 보면 알 수 있다. 대개 소나무는 등성이의 암석을 등지고 여기저기 군락으로 서 있고 참나무들은 소나무들을 옹림하듯 에워싸고 온 산을 덮고 있다. 참나무에 의해서 소나무의 기품이 뛰어나 보이고, 소나무의 뛰어난 기품에 의해서 참나무의 필요성이 인식된다. 백두대간의 아룸다운 숲들은 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그렇게 이룬 혼효림이다. 그 돈독한 숲의 사회상이 인간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