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정 2011. 1. 19. 21:28

와온

 

김경성 시집 『와온』. 남도 끝자락 순천만 바닷가의 풍광을 그대로 옮겨 놓은 시를 비롯해, 비릿하고 구불구불 한 곳곳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빛나는 작품이다. 특히 각각의 다른 풍경을 여행자의 시선으로 읽어 내려가는 한편, 다양한 마을 곳곳의 숨겨진 풍경을 시인만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목차

1부 직립으로 눕다
직립으로 눕다
와온臥溫
날카로운 황홀함
오래된 그림자
나무의 유적
견고한 슬픔 1
가오리가 있는 풍경
어느 나무에 관한 기록
맷돌
저수지의 속 길
응고롱고로
통명痛鳴
쓸쓸한 생
새들은 왜 부리를 닫고 날아갔을까꽃잠

2부 물고기 방
솟을연꽃살문
깊고 두꺼운 고요
나무는, 새는
이끼
달의 궤적
달의 궁전
달의 뒤편 1
욱신거리는
견고한 슬픔 2
잊혀진 사벌국
물고기 방
붉은 그늘
폐허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란 왕국
침전

3부 바람의 발자국
바람의 꽃
오래된 나무가 있는 풍경
달의 뒤편 2
탁본
청동거울의 기억
깊은 잠
바람의 궁전
저물 무렵
덧무늬 토기
검은꼬리사막딱새
도리사 석탑
깃털에 기대다
파문
바람의 발자국
두레박

4부 붉은 달에 관한 기억
위험한 퍼즐
나무의 원적
마애불 옷자락에 숨어들겠다
채석강, 그 이면에
실크로드
물컹한 슬픔 1
붉은 것들은 슬픔이 깊다
사북역 근처
붉은 달에 관한 기억
물의 유전자
거리 재기
꽃 핀다, 꽃 피어난다
상처
물컹한 슬픔 2


             해설/나호열 -풍경으로 들어가는 독법 혹은 탐미의 기록

 

 

 

 

출판사 서평

 

2005년 『예술세계』로 등단한 김경성 시인의 첫 시집이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이룩한 소중한 시들이 묶여 있다. 치밀하고 내밀하게 사물과 현상의 속살 깊숙이 들어가서 결 고은 생명의 숨소리를 듣고 그 아름다움을 받아 적는 시인의 독법은 충분히 아름답고 독창적이다.

김경성 시의 색채는 수묵담채화풍이다. 그가 붉은 색을 말할 때에도 그 언어의 색채에는 오랜 은유의 바람으로 되새김질한 창호지의 빛이 묻어난다. 그의 슬픔도 그렇다. 그의 슬픔은 해질녘 불어오는 바람처럼 나무의 몸속으로 들어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먹빛 문장을 그리거나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수평으로 물결진다. 슬픔이 얼마나 깊으면 이토록 잔잔하고 간절할 수 있을까. 바람이나 강물처럼 아주 멀리 가려고 했던 김경성 시의 풍경에는 읽을 수 없는 암각화나 세상과 단절된 유적들, 나무의 나이테 같은 무늬로 가득한데, 그 무늬에는 한때 시간이었던 것, 누군가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나 먼 길을 떠난 새들을 불러 모으는 이미지로 아름다운 파문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슬픔의 동선을 섬세하게 읽어가는 그의 언어가 실크로드를 걸어 누란 왕국이나 사막의 등고선을 찾아 풍화하는 쪽을 선택할 때, 그의 시에는 바람의 흔적이 남긴 폐허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를 미적으로 재구성해가는 이 유미주의자의 시가 갖는 미덕은 그 폐허의 근처에서 피는 시간의 흔적, 돌꽃이며 이끼나 무언가 내려앉았던 자리의 깊은 그늘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의 시가 폐허보다 더 오래되고 욱신거리는, 우리들의 누추한 삶의 온기와 이미 잊혀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기억을 존재의 입맞춤을 통해 미학적으로 다시 되살려내는 지점에서 솟을연꽃살문이 아름다운 우물천장 깊은 집이 탄생한다. 그래서 김경성 시인이 걸어가는 풍경에는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그의 언어는 깊은 우물에서 막 길어 올린 물처럼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것이다.
―신현락(시인)

그녀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아프다. 애초 물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돌에 스며 눈물이 되었다가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파닥파닥 은비늘 반짝이는 물고기처럼 두 손으로 움켜쥐려하면 빈 손바닥만 남는다. 그녀의 시는 편지 같다. 꼬깃꼬깃 접어 가지고 다녔으므로 모서리가 죄다 닳아져버린, 수많은 시간을 쪼개어 가루로 만든 다음 물로 반죽하여 적당한 온도로 구워놓은 빵 같다. 아무도 몰래 숨겨놓고 혼자 야금야금 먹고 싶다. 나는 그녀의 시 중, ‘슬픔도 가벼워질 적이 있’도록 갈고 또 갈며 ‘무언가를 부서뜨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맷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 있어 처마 밑 배지느러미 흔들어 구부러진 길 펴 놓’는 「물고기 방」, ‘이제 막 초록으로 번져 수묵담채화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저물 무렵」, ‘한쪽 벽면에 제 모양의 그림자 그려놓고 천천히 흔들거리’는 「탁본」을 특히 더 좋아한다.
―고성만(시인)

책속으로

와온臥溫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멈추는 곳이 와온臥溫이다
일방통행으로 걷는 길 바람만이 스쳐갈 뿐
오래전 낡은 옷을 벗어놓고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곁을 지나서
해국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바람이 비단 실에 묶여서 휘청거리는
바람의 집으로 들어선다
눈가에 맺힌 눈물 읽으려고
나를 오래 바라봤던 사람이여
그 눈빛만으로도 눈부셨던 시간
실타래 속으로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만이 아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날줄에 걸쳐 있는
비릿한 추억, 삼키면 울컥 심장이 울리는 떨림
엮어서 갈비뼈에 걸어 놓는다
휘발성의 사소한 상처는
꼭꼭 밟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너무 깊은 상처는 흩어지게 펼쳐 놓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집
네 가슴 한껏 열고 들어가서
뜨거운 기억 한 두릅에
그대로 엮이고 싶은 날이다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