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의 窓 .../책이 있는 방 -

[허수경시집]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선정 2011. 1. 19. 21:12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났으며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을 두 권 내고 고향과 서울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엎드려 책 읽고 남의 시간을 발굴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십수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에도 시집과 산문집을 내곤 했다. 지금껏 펴낸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 있고, 산문집으로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모래도시를 찾아서』, 장편소설로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가 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제1부

나의 도시
저녁 직전
추운 여름에 받은 편지
여기에서
추운 여름에 쓰는 편지
거짓말의 기록
수수께끼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산벚을 잃고
고구마별
글로벌 블루스 2009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오후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제2부

옛 가을의 빛
비행장을 떠나면서
찬 물새, 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양
그림자의 섬
아름다운 나날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흑해 옆 호텔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기차가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
식물과 동물이 탄생하던 진화의 거대한 들판, 나라는 것을 결정하던 의지는 어디에 있었던가?
카라쿨양의 에세이
그러나 아직 당신이 오지 않았는데 고생의 한 남자가
슬픔의 난민
울음으로 가득 찬 그림자였어요, 다리를 절던 까마귀가 풍장되던 검은 거울이었어요(혹은 잠을 위한 속삭임)

제3부

사막에 그린 얼굴 2008
어린 밤의 공기
입술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
폭풍여관, 혹은 전투 전야
눈동자
검은 새 한 마리
내 마음속 도저한 수압에서 당신은 살아간다, 내 기억이여, 표면으로 올라오지 마라
여기는 그림자 속
기차역에 서서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서
바다 곁에서의 악몽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내가 쓰고 싶었던 시 제목, 의자

제4부

밤 속에 누운 너에게
추억의 공동묘지 아래
빛의 짐승
문장의 방문
풍장의 얼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1982년 바다를 떠나며
여기는 이국의 수도
이를 닦는다
고향
사탕을 든 아이야


발문_ 나비와 잠자리 : 시를 쓰는 마음에 관하여 | 서영채(문학평론가)

 

 

● 문학동네시인선, 시작을 말하다!

‘문학동네시인선’이 새롭게 출발한다. 한국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1년 반 동안의 기획 기간을 거쳤다. 중견과 신인을 아우르면서, 당대 한국시의 가장 모험적인 가능성들을 적극 발굴해서 독자들에게 선보이겠다는 포부다.
이런 취지에 걸맞게 시집의 형태가 파격적이다. 수십 년 동안 관행처럼 굳어진 시집 판형에 일대 혁신을 단행했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달리 행이 길어졌고 행과 연의 구분이 없는 산문시의 비중도 커졌다. 이것이 일시적인 양상이 아니라 현대시의 역사철학적 조건과 밀접한 것이라면, 차라리 그 필연성을 인정하고 잠재돼 있는 가능성을 극대화하자는 것이 ‘문학동네시인선’의 취지다. 단형 서정시 형태에 최적화돼 있는 기존 판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 시집 판형을 두 배로 키우고 이를 가로 방향으로 눕혔다. 독자들에게는 가독성을 높인 시집을 제공하고, 시인들에게 더 급진적인 실험의 장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 허수경 시인, 그리고『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시인의 신작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펴낸다. 2005년 네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후 햇수로 6년 만에 선보이는 시들이다. 1987년 『실천문학』으로 데뷔했으니 시인으로 사는 일도 근 24년이 되었고, 1992년 독일로 떠나 지금껏 그곳에서 살고 있으니 이국에서 사는 일도 근 20년이 되었다. 그사이 시인은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쉽게 계산해보자면 5년에 한 권 꼴이니 그리 과작도 그리 다작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24시간을 사는 삶이 아니니 우리말로 속 깊이 호흡할 수 있는 시인만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감히 짐작이나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움이 차오르지 않으면 뱉을 수 없는 시인의 그 말들.

한국 시단에 있어 허수경 시인이 차지한 그 자리가 어떠한지 잠시 생각해본다. 시인만의 고유한 울림이 있는 자리다. 시인만의 고유한 언어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리다. 시인은 여자가 아닌 여성의 목소리로, 목청껏 지르고 싶었으나 도저히 삼킬 수밖에 없었던 세상사의 많은 슬픔과 비애들을 다양한 음역을 가진 시로 표출을 해주곤 했다. 시인 스스로 일찌감치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라고.

이번 시집에는 총 54편의 시가 실렸다. 고고학적인 세계와 국제적 시야를 바탕으로 그사이 세상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사유는 더욱 깊고 더욱 넓어졌으며 더욱 간절해졌다. 그 간절함의 대상은 우리가 쉽게 정의내릴 수 있을 만큼 쉽고 단순하며 가벼운 것이 아니다. 무한이다. 우주이며 역사다. 사랑이다. 당신이며 너다.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내가 읽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 다시금 책장을 넘기게 되는 힘, 삶을 다 살고 났을 때 내가 살아낸 것이 과연 무엇인가 다시금 삶을 반추하게 하는 힘, 이 시집은 우리에게 마침표를 찍어주는 게 아니라 물음표를 던진다. 물론 홀로 고민하게 하지 않는다. 함께 고심하게 만든다.

부드러운 이 완력을 따라가다보면 안팎으로 세상의 온갖 자잘한 떨림과 함께 흔들리는 시인과 만난다. 그렇게 비틀, 하는 순간의 균열을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온 말들을 좇는 시인과 만난다. 시인은 몸이 가는 대로 시를 섬긴다. 그러다보니 한 줄의 넋두리로 완성되는 시가 있었고, 어떤 시들은 희곡이나 에세이처럼 다른 장르의 옷을 입어야 숨을 쉬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시들은 그 자체로 노래였다.

“수다스러워졌달까요. 이번 시집엔 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글도 있고, 희곡 형식을 빌려 쓴 시도 있어요. 장르 통합의 욕심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노래의 형식으로 풀 수 있는 주제가 있는 반면, 산문시의 형태를 빌려야만 풀어낼 수 있는 주제도 있는 것이죠. 시는 마땅히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2010년 10월 1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중에서

시인의 이번 시집을 하나의 거대한 유적지라고 하자. 감히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앞서 펴낸 네 권의 시집 속 시편들의 기원을 바로 이 시집 속에서 발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시를 읽는다. 아니, 시를 캔다. 그 뿌리의 끝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에서 끊어지는지 알 수 없는 그 막막함을 희망으로 우리는 벌써부터 시인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다.


● 시 속에서

따뜻한 이마를 가진 계절을 한 번도 겪은 적 없었던 별처럼  
나는 아직도 안개처럼 뜨건하지만 속은 차디찬 발을 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냥 말해보는 거야

적혈구가 백혈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차곡차곡 접혀진 고운 것들 사이로
폭력이 그들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것처럼
폭력이 짧게 시선을 우리에게 주면서
고백의 단어들을 피륙 사이에 구겨넣는 것처럼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중에서



● 시인의 말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옛 노래들은 뜨겁고 옛 노래들은 비장하고 옛 노래들은 서러워서 냉소적인 모든 세계의 시간을 자연신의 만신전 앞으로 데리고 갈 것 같기에, 좋은 노래는 옛 노래의 영혼이라는 혀를 가지고 있을 것 같기에, 새로 시작된 세기 속에 한사코 떠오르는 얼음벽, 그 앞에 서서 옛적처럼 목이 쉬어가면서도 임을 부르는 곡을 해야겠다 싶었기에, 시경의 시간 속에서 울었던 옛 가수들을 위하여 잘 익어 서러운 술을 올리고 싶었기에.

2010년 겨울
허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