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부호
숨어있는 부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예수 그리스도
『구약』「욥기」가 간결직절하게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神)과 세계에 미만해 있는 재앙 및 인간 고통을 어떻게 화해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타고난 혹은 사회적으로 마련된 특혜와 행운을 누리는 행복자들은 유리한 조건이 자기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자부하기 쉽다. 스스로 초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 부당한 재앙과 고통에 시달리는 불행 주체들은 왜 유독 자기에게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지워져 있느냐고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숨어 있는 서양의 신은 입을 봉한 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모든 것을 전생의 업보와 윤회로 설명하는 옛 인도의 교리는 일말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중국에 와서 포교했던 서양 선교사들이 부딪쳤던 가장 어려윤 설득사항은 원죄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 옛 조상이 저지른 죄과를 왜 애매한 후손이 갚아야 하는가라는 지상적.상식적 회의를 설복시키기가 가장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상적이고 회의적인 관점은 흔히 예수 스리스도의 마지막 절규도 허술히 보지 않는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는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제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제9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예수의 마지막 말은 절망과 환멸의 외침이 아닌가? 그것은 그가 영락없이 사람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육성의 증언이 아닌가? 하나님의 외아들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 간곡한 원망의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은 터져나온 외침소리도 절망적인 호소도 아니다. 예수 그리도는 단지 『구약』의「시편」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의에 값하는 우리 시대의 휴머니스트 토마스 만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내가 메시아>라는 자기정체성의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용하고 있는 것은 『구약』「시편」의 첫 대목이다. 표준 새번역으로 읽으면 22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나의 하나님,
온종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밤새도록 부르짖어도
모르는 체하십니다.
(중략)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그를 찬양하여라.
야곱의 모든 자손아,
그에게 영광을 돌려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아,
그를 경외하여라.
(중량)
그러난 나는
주님을 위하여 살리니
그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절망감에서 터져나온 자연스러운 하소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구약』「시편」을 그대로 암송하고 있을 뿐이라고 볼 것인가? 혹은「시편」을 인용하면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에 따라서 맥락 해석은 하늘과 땅 차이를 빚어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편」22편에 보이는 첫 대목임을 알아보지 못할 때 그 해석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아들의 절망적인 절규라고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예수의 최후의 목소리에는 두세 겹의 목소리와 울림이 배어 있는 것이다.
숨어 있는 인용 부호
모든 사람의 발언에는 소속한 언어공동체의 관습과 가치관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모든 발언은 흉내요 대물림이요 선인의 인용임을 면치 못한다. 모든 말에는 사회의 때가 묻어 있기 때문이다. <역시 사랑이란 말은 하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느라 옥희도씨를 향한 내 지극한 갈구를 담기에는 너무도 닮아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또 사랑이란 소리를 강조하면서 그와 나 사이엔 암만해도 딴 낱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안 써본 슬프고 진한 어휘가.> 소설 「나목(裸木」의 여주인공이 절감하고 있는 말의 닳아 있음에 모든 시인은 민감핟. 시인은 <아무도 안 써본 슬프고 진한 어휘를> 추구한다. 그것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간 사람들이 상징주의 시인들이다. 닳아빠진 말에 절망하여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음악을 동경하고 그 언어 등가물(等價物)을 마련하려 독자적인 시적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지만 대묻고 닳아빠진 언어는 시인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모든 낱말에는 무수한 선인들이 발음하고 발언했다는 뜻에서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가 숨어 잇다. 사장(死藏)된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를 특정 문맥에서 되살려 시인은 자기 언어에 풍부한 암시성과 두겹 세겹의 울림을 더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때묻고 닳아빠진 말이 아무도 써보지 않은 슬프고 진한 어휘로 변용된다. 낯익은 것이 낯선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인용부호를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통해서 되살려보기로 한다.
― 그대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수수께끼 같은 사내여,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누이인가, 아니
면 아우인가?
―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아우도 없다.
― 친구는?
― 그대는 지금껏 내가 그 듯도 모르는 말을 쓰고 있다.
― 조국은?
― 조국이 어느 위도 아래 있는지조차 모른다.
― 美人은?
― 불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다.
― 황금은?
― 그대가 신을 증오하듯 난 그것을 증오한다.
―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불가사의한 이방인이여?
― 난 구름을 사랑한다…… 저기 저 지나가는 구름을…… 저 신묘한 구름을!
― 보들레르, 「이방인」전문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 첫머리에 보이는 작품이다. 불투명이 독단적 교의로까지 올려져 있다며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혹독하게 비판했을 때 톨스토이가 그 사례로 거론한 작품 중의 하나가 이 작품이기도 하다. 보들레르가 나타내고 있는 감정은 불량하고 극히 저급한 것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이 언제나 의도적으로 괴팍하고 불투명하게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적인 불투명성은 의지만 있다면 평명(平明)하게 말할 수 있는 산문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며 첫번째 사례로 든 것이 바로 「이방인」이다. 보들레르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이 톨스토이가 규탄하다시피 한 불투명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 만년의 과격한 독단론이 빚어낸 불신 아닌 이해의 자발적 유보현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 내장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를 되살려본다면 불량하고 저급한 감정이라고 혹평한 톨스토이의 불편한 심기를 이해하는 것이 한결 용이해질 것이다.
대화체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얼마쯤 바귀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묻고 있는 첫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에서 복음서의 대목을 떠올리는 것은 성서와 친숙한 서구의 지적 전통 아래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마태복음」12장 48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옝수께서, 그 말을 전해준 사람에게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하고 말씀하셨다.> 또 같은 복음서 10장 37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황금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다시 「마태복음」의 19장 21절을 연상하게 한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마태복음」의 대목을 떠올리면서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를 찾아낸다는 것은 보들레르가 반드시 그것을 의식하고 시쓰기와 운필(運筆)에 임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인유(引喩)든 아니든 복음서의 대목이 잠재의식의 수준에서 잠복해 있다가 집필과정에서 명시화되었다는 가능성을 지적해 두는 것일 뿐이다. 복음서의 대목이 시인에 의해서 희롱조로 뒤틀려 인용되었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의 복음서에 준거하고 있던 늘그막의 톨스토이에게는 특히 불량하고 저급한 일로 비쳤을 것이다.
가족과도 친구와도 조국과도 담을 쌓고 또 황금 송아지도 거부하면서 불멸의 여인을 사랑하겠다는 유미적 예술가는 보들레르만이 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뒷세대인 제임스 조이스의 생애도 예술 창조를 위해서 가족과 조국과 종교를 등진 살아 있는 실례이기도 하다. 근대사회의 소외된 예술가를 극명하게 정의해 주고 있는 「이방인」은 산문시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보들레르 시편이기도 하다. 복음서에 대한 암묵적 언급을 도외시하더라도 우리들의 작품 이해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를 감득하는 것은 작품의 의미를 더욱 극명하게 해줄 것이다. 유미주의나 실미주의가 서구 근대에서 일종의 종교의 대용품 구실을 했다는 사실을 실감시켜 주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훈련된 문학독자의 소양의 하나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인용부호의 자리에서 희미한 부호의 윤곽을 찾아내어 겹친 목소리를 감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문학적 과거와 그 의식
말의 성격상 또 시가 시를 낳는다는 성격상 모든 시는 알게 모르게 선행 시편을 딛고 서 있게 마련이다. 이르는바 상호 텍스트성이나 대화이론이라는 이름으로 검토되고 있는 언어와 문학의 국면은 문학 소양의 기초의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시인들이 의지하고 있던 전통이요 관습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을 의식적 혹은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 않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시 전통을 강렬하게 의식하는 입장, 엘리엇이 역사의식이라고 특정적으로 명명에 임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엇에 대한 비평적 동의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가 표절시인이라는 폄훼를 받곤 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유에의 의도적인 의존을 독자들이 간과했던 것이다. 하기야 서투른 시인은 모방하고 능란한 시인은 훔친다고 했으니 표절시인이란 폄훼가 그의 경우 실은 능란한 시인이라는 찬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등뒤에서
자동차의 경적과 모터 소리를 듣는다.
이 차는 봄에 스위니를 싣고
포터 부인에게로 갈 것이다.
「황무지」의 제3부 <불의 설교>에 나오는 위엣구절에 대해 시인 자신이 주석을 통해서 앤드루 마블의「수줍어하는 애인에게」를 참조하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등뒤에서 항시 듣는다.
시간의 날개 달린 戰車가 황급히 다가오는 것을,
그리고 우리 앞에는 저기
광막한 영원의 사막이 놓여 있다.
영시의 보석 중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아온 마블의 시는 과장과 대담하고도 기발한 비유를 통해서 여성을 꼬이는 유혹의 시다. 시간이 무궁무진하다면 문제될 것 없지만 관능적 희열에의 초대에 불응한다는 것은 큰 죄라고 화자는 말한다. 시간은 날개 달린 전차로 비유되어 그 다가오는 소리가 박진감을 얻는다. 흐르는 물과 같다는 동양의 유서 깊은 비유와는 성질을 달리하는 섬뜩한 역동성이 있다. 죽은 후의 영원한 시간이 광막한 사막으로 비유되어 있는 것도 화자의 장난기 섞인 조급함을 실감나게 전해 준다. 이러한 17세기 형이상파 시인의 황당하리만큼 핍진성 있는 세계 옆에 엘리엇은 20세기의 경적소리와 자동차소리를 도입한다. 사라져간 시대의 화려한 수사학을 배경으로 해서 드러나는 런던의 모습은 너무나 맥빠지고 건조해 보인다. 과장되었을 망정 휘황한 17세기와 불모의 근대도시가 일으키는 대조의 효과는 겉보기보다 한결 충격적이다. 은은하게 배어 있는 정열과 위축된 관능의 대조도 작품 전체를 고려할 때 두드러 진다. 두 줄의 시행을 통해서 훨씬 많은 시행의 결집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세심한 독자들은 두겹 세겹의 목소리를 감득하게 된다.
엘리엇처럼 의식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인유에 의존하지 않은 경우에도 상호 텍스트성이 빚어내는 효과는 시와 문학의 상례이다. 서정적 표출보다 일정한 논의를 펼치는 경우 결과적으로 인유에의 의존도가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존재의 거대한 연쇄>란 생각을 논술하고 있는 18세기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은 그 점 편리한 사례를 제공해 준다.
그러니 네 자신을 알라
감히 신에 대해 시비하지 말라
인간의 적정한 연구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의 적정한 연구대상은 인간이다>란 생각은 인문주의의 핵심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의 테렌티우스는 <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것치고 내게 무관계한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는 말을 남겼다. 16세기의 프랑스 성직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샤롱은 <인간의 참다운 학문과 참다운 연구대상은 곧 인간이다>란 말을 『지혜에 관해서』란 책에 적고 있다. 포프가 한 일은 이러한 생각을 보다 간결하고 선명하게 요약한 것일 뿐이다.
진리의 유일한 판단자이면서 끝없는 오류 속으로 던져지니
세계의 영광이자 조롱감이자 수수께끼이다.
파스칼은 <인간이 우주의 영광이자 허드레>라고 말했다. 허드레 대신에 조롱감이라고 포프는 썼다. 조롱감이라고 함으로써 어떤 가벼운 장난기를 도입했지만 영광과 대조적이란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포프의 당대 독자들이 샤롱이나 파스칼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은 아주 높다. <존재의 거대한 연쇄>란 생각 자체가 포프의 창의적 소산이 아니다. 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을 포프는 재기발랄하게 종횡무진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론」의 거의 모든 시행은 이렇게 선행 시편이나 저작에 의존하고 있다. 혹은 선행 저작이나 시편의 대목을 딛고 서 있다. 따라서 시의 목소리는 두겹 세겹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 울림을 빠뜨리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 훈련된 혹은 성숙한 독자의 수용방식인 것이다. 시읽기의 즐거움은 그만큼 실한 것이 된다.
시인이 비판적인 관점에서 선행 작품을 활용하는 일도 물론 드물지 않다. 이때 인유는 매우 축약적이고 경제적인 장치가 된다. 가령 우리는 임화의 대목을 참조할 수 있다.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靑年들은
두려움보다 勇氣가 앞섰다.
山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게다.
(중략)
아무러기로 靑年들이
平安이나 幸福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위에 올랐겠는가?
첫번 航路에 담배를 배우고
둘째번 航路에 연애를 배우고
그 다음 航路에 돈맛을 익힌 것은,
하나도 우리 靑年이 아니었다.
- 임화, 「玄海灘」
임화의 시는 대개 선이 굵고 우리 쪽의 기준으로서는 흐흡이 긴 편이다. 「현해탄」은 이러한 임화 시의 경향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서 작자도 애착을 가졌던 듯 시집의 표제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대의 고뇌에 충실하려 했던 그의 시적 성취가 그리 단단한 것도 드높은 것도 아니다. <먼 먼 앞의 어느날/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그대들의 불행한 생애(生涯)와 숨은 이름이/커다랗게 기록(記錄)될 것을 나는 안다>는 구절에 엿보이듯 젊은 날의 그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앞서 인용한 마지막 넉 줄이 정지용의 시행을 딛고 있음은 분명하다.
火筒옆 사닥다리에 나란히
濟州道 사투리 하는 이와 아주 친했다.
스물한살 적 첫 航路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
임화는 시인으로서 정지용과는 대척적인 위치에 있었다/ 또 실제 비평의 자리에서도 정지용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가령 <혼란이 내방하고 많은 시인들은 집잃은 어린아이들처럼 방황하였다. 이 동안의 에어 포켓을 메운 사람은 지용이라도 좋고 혹은 누구라도 무관한 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시사적(時史的)위치를 있으나 마나했던 것으로 격하하고 있다. 그러한 임화의 비판적 관점은 「현해탄」의 인유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담배와 연애에 임화는 돈맛을 추가하고 있지만 이러한 사적 영역에 골몰하는 부류는 그의 눈에는 전형적인 조선청년이 아니었다. <하나도 우리 靑年이 아니었다>고 적음으로써 정지용의 시세계가 당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希望을 안고 건너가/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청년들을 앞세워 이들을 통해 당대 사회현실을 전경화(前景化)시킨다. 특별히 매력 있는 시편은 아니나 그냥 읽을 만한 「다시 해협」의 세계가 임화 시의 맥락 속에서는 지극히 옹졸하고 한심스러운 평안이나 안락의 세계로 드러난다. 현실에서도 그러한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이르는바 소시민적인 행복 추구는 「현해탄」에서 준열하게 폄하되고 있지만 지용 시르 그러한 범주의 문학으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인유가 발휘하는 것이다. 담배와 연애라는 당초의 맥락에 <돈맛>을 추가한 것이 그 효과에 크게 기여한다. 임화의 정지용 비판은 다른 시편에도 보인다.
어느 누군 사랑에 입맛도 잃는다더라만,
이 바다 위 그대를 생각함조차 부끄럽다.
- 「밤 甲板위」
시집 『현해탄』에는 실제 현해탄을 배경으로 한 시편들이 아주 많다. 위엣작품도 그중의 하나다. 위의 인용시행이 <사랑을 위하얀 입맛도 잃는다>는 「또 하나 다른 태양」속의 구절을 빈정댄 것임은 분명하다. 시와 종교를 아울러 비판하고 있는 일거양득의 솜씨다. 임화가 정지용을 그만큼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지용 시를 인정했다는 반증이 될지도 모른다. 「현해탄」을 위시한 몇 편의 임화 시는 대중집회의 낭독시로서는 어느 정도 규격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나 歷史의 거센 물가로 닥아서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의 방랑자로 죽어버릴지 누가 알것인가?
靑年의 누가 과연 이것을 참겠는가? 두말 말고 江가로 가자.
넓고 자유로운 바다로 소리쳐 흘러가는 저 江가로!
- 「江가로 가자」
임화 시에 가장 빈번히 출몰하는 낱말은 청년이다. 현해탄을 다룬 시편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식민지 현실의 변혁 담당자로 상정되어 있는 <청년>은 동시에 이 땅의 양심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인 임화가 독자로 상정하고 호소한 것도 이러한 <청년>들에게일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으로서의 임화는 청년기를 넘어서서 시적 성숙에 이르지는 못했다. 「수향」「현해탄」「우리 오빠와 화로」등 몇 편을 우리는 계속해서 시로 읽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일제 식민지하의 깨어 있던 지식인의식의 실증적 자료 이상의 홀로서기 가치는 없어 보인다. 시인을 판단하는 평가자료는 어디까지나 시요 글이다. 그 밖의 어떠한 것도 질적 빈곤이라는 문학적 죄과의 면책사유가 되지 못한다. 그의 작품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병고와 병마는 독자의 가슴을 뻐근하게 한다. 그의 평탄치 못했던 생애와 무위로 끝난 <투쟁경력>의 도로(徒勞) 또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위로 받아 마땅한 그의 삶의 역정이 미숙한 시를 기억할 만한 시로 올려놓지는 못한다. 사상가와 혁명가로서의 엄청난 무게가 청년 마르크스가 써서 남긴 몇 편의 습작적 졸작을 시로 올려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모든 정성을 시에 바치지 않은 시인에게 뮤즈는 영락없이 앙갚음한다. 높은 뜻을 빙자해서 광대짓하며 어리광을 떠는 아마추어 시정신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다. 앞으로는 설 자리도 없을 것이다. 임화로서는 식민지 현실의 반영을 위한 조처였지만 시집 표제 현해탄이 일몬말이라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그의 한계를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정지용의 「해협」과 임화의「현해탄」은 같은 지점인데 표제로서는 뜻깊은 대조를 이룬다.「진달래꽃」「님의 침묵」「백록담」「사슴」「낡은 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등과 나란히 놓고 볼 때 표제만으로도 끼울린다. 이름은 상징이요 시집 표제의 선택은 상징의 선택이다. 현해탄은 이 땅의 모든 청년이 건너간 바다가 아니었다. 「현해탄」의 청년은 성숙에 이르지 못한 채 구호에 매달려 잇는 감상적 미성년이다.
비판적 인유의 사례는 근래의 작품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시가 시를 낳는다는 원리를 생각할 때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예술작품은 선행 작품을 밑그림으로 해서 겹쳐놓는 두겹 세겹의 겹그림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짤막한 시편을 골라서 읽어볼 것이다.
저 얼어붙은
무한천공 위에서
곤두박혀 떨어져내리는
쌩쌩한 눈보라
그 어디에
새 한 마리 날아가더냐?
- 민영, 「凍天」
쌩쌩하게 눈보라치는 언 하늘에 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는 소묘적인 소품이다. 오싹하게 하는 한기를 감득하면서 독자들은 이 소품이 단순한 기상(氣象) 소묘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화자의 기개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막연한 느낌은 이 소품이 잘 알려진 선행 시편을 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보다 분명한 것으로 드러난다.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은 눈섭을
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冬天」
<반달 같은 눈썹>이라는 직유는 우리가 옛 소설이나 민담을 접할 때 흔히 보게 되는 전통적 수사법의 하나이다. 비슷한 것에 <외씨 같은 버선> <고사리 같은 손> 등이 있다. 위의 작품에서는 이 옛 수사법이 <눈썹 같은 반달>로 역전되어 있고 아예 반달을 눈썹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겨울하늘에 걸려 있는 반달은 마음속에서 그리는 임의 눈썹으로서 화자가 오랜 세월 동안 꿈으로 씻어서 하늘에 심어놓은 것인데 겨울새가 이를 알고 피해 간다는 것이다. 외국시에서 말하는 형이상파적 기상(奇想)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는데 그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은 앞서 말한 전통적 비유법이다. 하늘을 나는 새와 반달이라는 그림 모티브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서 독창적인 심상 풍경으로 변용되어 있다. 가령 한안(寒雁) 같은 것은 현대 동양화 같은 데서 낯익은 것이지만 이 기본적 구도가 전통적 비유법의 교묘한 활용을 통해 위이 작품으로 완결된 것이다. 화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을 것이다. 사실 진술이 아니라는 점에 작품의 묘미가 있다. 꾸미고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나 문학의 한 속성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기발한 상상적 변용에 대해서 민영의 「동천」은 반발하는 것이다. 눈보라 치는 겨울 하늘에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고 지적하는데 그것은 힐난에 가까운 어조이다. 민영은 미당 시가 보여주고 있는 사실세계에 대한 경험적 충실성을 존중하는 입장이며 그것은 자연히 사회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으로 이어진다. 민영 작품 속의 눈보라는 물리현상이면서 동시에 사회현실에 대한 우의적 소도구가 되어있는 셈이다. 민영의 「동천」은 미당의「동천」을 일변 비판하면서 미당의 시세계와 접근법을 풍자하고 있다. 미당의 밑그림에 겹쳐놓은 의문부호인 셈이다.미당의 밑그림을 알지 못할 때 민영 작품은 문자 그대로 단순한 소묘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미당의 「동천」이 같은 이름의 미당시집 첫머리에 수록되어 있으며 민영의「동천」역시 민영 시집 『엉겅퀴꽃』첫머리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도 참고할 만한 사안이다.
세계 병원
우리는 위에서 문학적 과거를 어느 정도 적극적 혹은 의식적으로 활용한 사례를 검토해 보았다. 어느 정도라고 한 것은 검증
할 길 없는 추정사항이기 때문에 덧붙인 단서일 뿐이다. 작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는 주체적 독자의 입장에서 문학적 과
거와 현재의 공존을 살펴보기로 한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病院뒤뜰에 누워, 젊은 女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日光浴을 한다. 한나
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女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
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 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病을 모른다. 나한테느 病이 없
다고 한다. 이 지나친 試鍊 이 지나친 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花壇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꽃고 病室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女子의 健
康이-아니 내 健康도 속히 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病院」전문
젊은 여성이 하얀 다리를 드러낸 채 일광욕을 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인 그림이 되어 있는데 제법 그럴싸한 근대식 병원의 정경의 도입이다. 폐결핵을 앓는 여성환자의 홀로 있음이 찾아오지 않는 나비와 바람기조차 없는 살구나무를 통해서 더욱 선명해진다. 군더더기가 없는 고전적 간결성이 특징이다. 화자와 의사와의 대면에서 작품은 절정에 이른다. 병이 없다고 하는 늙은 의사의 진단에 화자는 시련과 피로를 경험한다. 세대간의 이해 단절에서부터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소통 단절에 이르는 많은 것의 집약적인 암시이다. 실제로 젊은 화자는 육체의 질환 없는 신경증 환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늙은 의사의 역부족이 젊은 환자의 골병을 간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젊은 화자는 찾아간 병원에서 아픔의 정체 확인보다는 몰이해의 시련만을 경험한다. 그는 여성환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보며 그녀와 자신의 건강 회복을 바라본다. 피곤한 화자는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여성환자가 부러웠던 것이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요양이나 입원이 아니라 휴식일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도입부와 종결부는 화자와 의사의 대면과 그 자초지종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상황 세목이라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화자의 시련과 피로이다.
윤동주 자신은 한때 간행되지 않은 초고시집의 표제를 <병원>이라고 구상했었다고 한다. 세상이 환자투성이의 병원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세계를 무대라고 생각하는 관점은 고전고대부터 있어온 유서 깊은 것이다. 병원이라는 제도는 근대의 소산이기 때문에 세계를 병원이라고 간주하는 생각은 그리 오래된것은 아니다. 걸출한 산문가이자 의사였던 17세기 영국인 토머스 브라운은 『의사의 신앙』이란 책에서 <이 세상은 객주집이 아니라 병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는 곳이 아니라 죽는 곳이란 말이다>라고 적고 있다. 보들레르도 산문시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에나」에서 삶을 병원에 비유하고 있다.
인생은 환자들이 제가끔 침대를 바꿔 눕고 싶어하는 욕망에 들린 하나의 병원이다. 어떤 환자는 난로 앞에 누워 고로워하
고 싶어하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옆자리라면 회복이 되리라고 믿고 있다.
내게는 내가 현재 자리하고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라면 항상 만사가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자리를 바꾸는 문제가
바로 내가 나의 영혼과 끊임없이 논쟁하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드물게 <Anywhere out the World>,란 영어 표제로 되어 있는 이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되풀이 노래한 모티브의 하나인탈출과 출발지향의 작품이다. 마지막 끝내기에서 영혼은 <어디라도 좋다!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하고 외친다. 환자들이 침대를 바꿔보고 싶으하는 병원으로 삶을 파악하고 있는데 환자를 부러워하는 건강인도 있는 법이다. 깨끗한 병실에서 보호받고 누워 있는 환자가 부럽기도 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휴식과 타인의 배려와 행방이 묘연한 환자의 탐욕과 악의의 교호(交互)작용이 매력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동주 「병원」의 화자도 젊은 여성이 누웠던 자리에 가서 누워본다. 그것은 관능적 동작이기도 하지만 피로한 화자의 요양환자 선망과도 관련될 것이다. 알아주는 이 없다는 젊은이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윤동주의 「병원」은 절망적으로 어두운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화자의 젊음에서 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보들레르의 산문시에서 화자의 영혼은 <폭발하여> 절규한다. 보들레르가 죽은 해인 1867년 사후에 발표되었으니 최만년(最晩年)의 작품이다. <나는 천 년을 살았던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보들레르는 「우울」이라는 『악의 꽃』시편에서 적고 있다. 「이 세상 밖이라면 어느 곳에나」에는 죽음에의 소망이 거의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와 견주어볼 때 윤동주의「병원」은 건강하다. 행복의 예감조차 담고 있다. 비록 폐결핵 환자라 하더라도 젊은 여성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유명한 릴케의「말테의 수기」에서도 근대도시는 병원인 양 제시된다. <그렇다.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이곳으로 온다. 그렇지만 여기 와서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출을 하였다. 내가 본 것은 병원들이었다.>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파리로 온 지 3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몇 해가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말테는 편지를 쓰려다가 만다. <내가 변하고 있다고 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변하고 있다면 나는 분명 옛날의 내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종전의 내가 아니라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나를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에게 편지쓰기는 불가능하다.> 스물여덟 살 된 이 청년이 매우 섬세하고 민감한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은 곧 드러난다. 이르는바 병적인 섬세함이요 민감성이다. 이 청년도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전기치료해 보길 원하였다. 좋다, 나는 종이쪽지를 건네받았다.> 가끔 발열증세를 갖고 있는 말테는 자기 방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내 병으로 말하면 아주 이상한 증세를 일으킨다. 내 병이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다른 질병의 중요성이 과장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 병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다. 환자의 특징에 따라 다르다.> 이렇듯이 말테의 병도 의사가 알지 못하는 병이다. 그것은 젊음과 외로움과 도시에서 생겨난 병이다. 그것은 자의식의 병이다. 건강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의식하지 않는다. 병은 육체의 의식이다. 혹은 육체기관의 명령 불복종이다. 따라서 과도한 자의식도 질병이요 말테나 윤동주의 화자가 앓고 있는 것도 이러한 병일 것이다. 릴케에게 있어 파리는 병원이었다. 말테는 파리로 감으로써 자동적으로 환자로 편입된다. 미구에 그도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갖게 될 것이다.
체호프의 걸작 중편소설 「6호실」에서 병원은 감옥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성직자가 되고 싶었으나 의사가 되지 않으면 부자 관계를 끊겠다는 의사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의사가 된 안드레이예피미치는 성실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위인이었다. 또 이성과 정직을 열렬히 사랑했다. 부패와 타락에 찌든 시골 소도시에서 그의 정직과 양식은 도리어 일탈로 간주되어 마침내 자기가 의사로 근무하는 병원의 정신병 환자실에 수용된다. 밖에 내보내달라는 호소 때문에 구타까지 당한 그는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에 참례한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숨막히는 체호프의 「6호실」에서 사회는 병원으로 드러난다. 그것도 정신병원이다. 의사 자신이 환자로 수용되는 이 병원에서 치유와 구원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 「6호실」은 기막히는 상황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또 토마스 만의 압도적인 「마의 산」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위스 고산지대에 있는 결핵요양소는 그대로 1차대전 이전 유럽 시민사회의 상징이자 축도가 되어 있다. 또한 이 요양소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가시적인 것 이상의 사회적 개인적 의미를 띠고 있다.
윤동주의「병원」은 토머스 브라운과 보들레르와 체호프와 릴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엷게든 진하게든 이들은 세계가 병원이며 우리는 이해받지 못하는 환자라는 공통인식을 나누어 갖고 있다. 윤동주의 「병원」은 그래도 가장 가볼 만한 곳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태양을 사모하는」 그의 향일성(向日性)과 연관될 것이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중략)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워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아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 「별 헤는 밤」
모티브의 유사성을 설명하는 이론의 하나에 쿠르티우스의 토포이topoi란 개념이 있다. 고대의 수사학자들은 공적인 토론에 임할 때 토론 때의 논거가 될 만한 설득력 있는 사례들을 수집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즉각적인 응답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수집한 사례들은 loci communes(공통되는 장소)라 하였다. 영어의 commonplace란 단어는 앞에 적은 하틴말의 단수형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참고나 인용을 위해서 중요하다고 표시해 둔 글이나 책속의 개소(個所) 혹은 대목의 뜻이다. 이런 대목이 되풀이 인용되어 인구에 회자되다 보니 자연 평범 진부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평범하다는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수집된 화제의 사례를 쿠르티우스는 토포스 (복수는 토포이)라 부른다. 세계가 무대라는 것도 토포스의 하나로서, 플라톤에서 셰익스피어를 걸쳐 지금것 누누이 활용되고 있다. 그는 모티프의 유사성을 토포이의 의식적인 모방의 결과라고 하면서 문학적 연속성의 이론을 세운다.
의식적인 모방의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국면이 더 클 것이다. 또 우연의 일치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전파이론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는 모티프나 표현이나 이미지의 유사성은 너무나 많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영향관계로 추적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중요한 것은 유사한 모티프나 표현이 특정 맥락에서 얼마만큼 유효성을 발휘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브가 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無花果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겟다.
- 윤동주, 「太初의 아침」
<부끄런 데>는 치부(恥部)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형제여, 내가 부끄러운데를 싸매였으니/그대는 코를 불으라>란 대목이 정지용의 「말 1」에 보인다. 정지용 이후 언어에 대한 시인들의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좋은 쪽으로의 이러한 변화에 윤동주도 당연히 동참하였다. 사소하지만 위의 표현에서도 지용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모방이나 실례로 보는 것은 편협한 관점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유쾌한 비평적 소품인 「카프카와 그의 선배들」이란 에세이는 편협한 호사적(好事的) 관심을 겨냥한 것이다. 처음 그는 카프카를 불사조처럼 유례없는 단독자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문학적 선구자에 대한 연구에 착수한 그는 여러 시대와 나라에 걸친 문학 텍스트에서 카프카의 목소리와 글솜씨를 발견하게 되어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는 취지의 글이다. 제노 · 한유(韓愈) · 키에프케고르 · 브라우닝 등이 이를테면 카프카의 선배들이다. 보르헤스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고 있지만 모두 지어낸 농담이다.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독자들을 유쾌하게 해준다.
비평가의 어휘 속에서 선배란 말은 필요불가결하다. 그렇지만 이 말에서 논쟁이나 경쟁의 함의는 말끔하게 씻어내야 한다. 사실은 모든 작가가 자기자신의 선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우리의 과거관을 수정한다. 미래를 수정하게 되듯이.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관련된 작가가 복수인가 특정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소급적 영향>이라는 환상을 얘기하는 이도 있다. 엘리엇이 17세기 영국 셩이상파 시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에즈라 파운드는 이백(李白)에게 영향을 끼쳐 중국하작들에게 구금되어 있던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의 프랑수아 라블레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것은 20세기 영국의 제임스 조이스가 된다. 이를 본따 우리도 윤동주가 릴케와 체호프와 보들레르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 사이에서는 그러하다.
* 임화 : 「시단의 신세대」,『문학의 논리』(학예사, 1940), 그러나 위의 대목은 점잖은 것이고 아주 혹독한 발언이 많다. 가령 <하나의 어린 자식의 죽음을 만 사람의 동포의 死와 불행보다 아프게 정감하는 '영혼'과 '감성'에 대하여 나는 금할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는 대목도 보인다. (같은 책의「기교파와 조선시단」참조). 정지용의 시「유리창」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출처: 시란 무엇인가 <경험의 시학>/유종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