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정 2009. 11. 9. 11:45

인지의 충격

 

천하 大事가

걸려있다.

 

빨간 외바퀴

손수레에.

-W.C. 월리엄스

 

 

<시인은 가르치거나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최상의 경우 유익함과 감미로움을 어우른다.> 대개의 문학원론은 호라티우스의 이러한 취지의 말을 긍정적으로 원용한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주어야 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는 가르쳐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문학의 성질이나 기능에 관한 논의는 그 세목이나 정교성의 차이는 있지만 위의 명제를 두고 회전할 수밖에 없다. 감미로움이나 유익함을 너무 느슨하게 파악하면 논의의 엄밀성이 훼손되기 쉽다. 반면에 지나치에 옹색하게 규정하면 편협으로 흘러서 문학작품의 실제와는 동떨어지거나 겉돌게 된다. 특히 유용성이나 가르침을 비좁게 파악하면 속셈이 너무나 뻔한 교훈적 문학을 부추기는 셈이 된다. 프로이트가 유명한 말에 <나보다 앞서서 시인들이 무의식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무의식을 연구하는 방법일 뿐이다>란 것이 있다. 무의식의 발견자라는 칭송의 말에 대한 그의 답변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문학작품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대한 통찰을 전수받은 것이다. 이렇듯 문학작품은 인지적 가치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문학이 가르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뜻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인지하거나 막연히 알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재확인할 때 사람들은 서늘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배우는 것이 고통이 되어 있다는 인간 본성의 역전에 우리 교육의 위기가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절감하고 있는 터이다.

 

 

시적 순간

 

훌륭한 문학작품에는 우리의 망각 성향에 도전하는 기억할 만 한 요소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작중인물일 수도 있고 대화의 한 대목일 수도 있고 어떤 극적 장면일 수도 있다. 독자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이지만 어떤 삽화이거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작품을 읽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서 기억의 잔재로 남아있는 시적 순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시적 순간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작품, 아니 전체가 시적 순간으로 미만해 있는 작품이야말로 명편이요 걸작이라고 할 것이다.

 

                       이 고장에서 세 가지 언어를 안다는 것은 불필요한 사치예요. 사치기기는커녕 필요없는 가외 덧붙이야.

                       육손이처럼. 우리느 아무 필요도 없는 것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요.

 

                                                                                                                         - 「세 자매」제1막

 

체호프의 「세 자매」에 보이는 대사이다. 장군의 딸 3형제 중 둘째인 미샤의 말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아버지 장군은 외아들과 딸 3형제에게 영. 독. 불 세개의 외국어를 습득시켰다. 막내딸은 게다가 이탈리아말까지 안다. 최상의 인문교육을 받았고 그 때문에 이들 남매들은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교육은 그들의 삶 속에서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하다. 아니 구실은커녕 그들이 받은 교육은 그들의 사회적 고립과 소외의 주요 원인이 되기조차 한다. 그들의 세련과 계발된 품성은 사람들과 쉽게 어우르지 못하게 한다. 활력 있는 삶과 행복과 그 기호로서의 모스크바를 그리워하는 딸 3형제는 한때 주둔해 있던 군대 장교들과 어울리는 것이 그나마 낙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주둔지를 이동하게 된다. 이 희곡을 상연하기로 되었던 <모스크바 예술좌>단원들에게 희곡의 대사를 읽어주었을 대 많은 단원들이 슬픔에 감염되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 온다.

이렇다 할 극적 사건이나 파국 없이 생존의 기본적 슬픔이 전개되는 이 작품에서 그 최고 순간은 극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체호프 희곡의 주요 특징일지도 모른다. 또 독자나 관객에 따라서 그 시적 순간도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받은 교육이 불필요한 사치임을 넘어서 육손이의 여섯번째 손가락처럼 잉여의 덧붙임을 넘어서 불구성에 기여한다. 교육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사회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잉여인간 혹은 무용지물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아주 낯익은 인물들이다. 지식인이 사회의 육손이로 드러나는 것은 19세기 러시아에 한하지 않을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지식인 무용지물과 육손이의 대비는 절묘한 수사적 조처로 끝나지 않는다. 잉여인간의 이를테면 간결한 객관적 상관물로서 통찰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우리는 인지의 충격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적 인지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작중인물의 불행과 난경(難境)의 자의식이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우리는 작중인물의 충족되지 못 한 삶에 대한 호소를 엄살이나 허풍이라고 여길 수 없다. 또 그것을 값비싸지 못한 자기연민이라고 업수이 여길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과교육과 육손이의 비유는 시인 작가들이 활용하는 비유가 장식적 첨가물이 아니라 사물과 사태의 본질에 근접하는 정신의 기도임을 확인하게 한다. 이러한 불후의 이미지가 「세 자매」의 최고 순간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작자가 희극이라고 고집해 마지않았던 이 희곡작품의 전체성을 간과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모인 채로 일급의 작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문학경험 가운데서 가장 복된 순간은 이러한 최고의 순간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삶과 사람에 관해 인지의 충격을 주게 마련이다.

 

                       참아야 하네. 우리는 울면서 이 세상에 왔네.

                       그렇지 않은가? 처음으로 이승 공기를 접하고

                       우리는 울고불고하네. 이를 말이 있으니 들어보게……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울고불고하네.

                       멍청이뿐인 크나큰 무대로 나오게 되어 우는 것이네.

 

                                                                                            -----「리어왕」4막 6장

 

제정신이 아닌 리어가 눈먼 글로스터 백작에게 하는 대사이다. 셰익스피어의 대사치고 시적 순간으로 그득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최고의 순간은 역시 비극 속에 있다. 신이나 절대자와 같은 초월적 이성마저도 배제되어 있는 부조리의 공간에서 제정신이 아닌 노인이 하는 말은 낯익은 사실을 생소하게 재확인시켜 준다. 갓난이의 울음소리는 성곡적인 출산의 청각기호이다. 새로운 탄생의 신호로서 그것은 대체로 기쁨이나 축복의 계기가 되어준다. 그러나 갓난이는 무의미하고 부조리하고 잔혹한 멍청이 무대로 오르게 된 것이 서러워서 우는 것이라고 불행한 노인은 말한다. 관객들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자책감마저 느끼게 된다. 갓난이의 울음소리는 이제 예전과 같지 않게 된다. 조그만대로 모든 인지의 충격은 우리의 익숙한 경험을 새롭게 조명해 준다. 인상파의 그림이 나온 이후 사람들이 풍경의 색조를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경험에 대한 새롭고 도전적인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생각의 계기

 

                        타인을 해칠 힘이 있지만 해치려 하지 않는 사람들.

                        해코지할 가락이 있어 보이지만 해치지않는 이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는 하지만 스스로는 돌덩이처럼

                        꼼짝 않고 냉랭하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이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하늘의 은총을 물려받고

                        자연의 부(富)를 낭비함이 없이 헤프지 않게 쓴다.

                        이들은 제 얼굴의 주인이며 임자이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제 뛰어난 자질의 마름에 지나지 않는다.

                        여름꽃은 씨 맺음 없이 제 홀로 피었다 시든다 하더라도 향기를 여름에 뿌려준다.

                        하지만 이 꽃이 몹쓸 병에 걸리면

                        어떤 잡초보다도 초라한 몰골이 된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행동거지로 고약하게 되기 마련,

                        썩어 문드러진 백합은 잡초보다도 그 내음 고약하다.

 

                                                                                             ----셰익스피어,「소네트 94」전문

 

셰익스피어는 154편의 14행시를 남겼다. 위에서 뜻의 뼈대만 옮겨놓은 14행시 94번은 적이 모호한 시편의 하나로 알려져 있어 사람마다 해석이 구구하다. 해코지할 힘이 있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판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인가에 관해서 냉큼 단언하기는 어렵다. 돌덩이의 이미지가 환기감하는 냉랭함은 해칠 힘이 있으면서 해치지 않는 덕성에 대한 유보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덩이의 이미지가 향내나는 여름꽃의 이미지로 중화되어 있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이 시의 무게는 덕성의 중층성을 시사하면서 도덕적 문제의 논의가 흔히 빠지기 쉬운 2항대립의 단순성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 있다. 첫머리의 대담한 진술은 남을 해칠 능력도 없는 약자의 선이 도덕적 선택의 결과가 아닌 수동성의 겉모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사실을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해코지할 수 있는 힘을 억제하는 데 덕성의 덕성다움이 있다는 생각은 심층심리학의 인간론에 익숙한 현대독자의 공명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덕성 소유의 그것보다 더욱 고약할 수 있다는 것도 현대독자들의 심리적 지지를 획득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잡초의 그것보다 한결 고약한 썩은 백합의 악취라는 구상적 세목이 이 14행시의 종결을 인상적으로 끝내주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매력은 그 진술의 진위에 있지 않다. 산문으로 옮겨놓은 번역에서 시적 진술이나 이미지는 덧나거나 변용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사고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전언이나 결론이라고 생각되는 시적 사고의 부위가 아니다. 사고의 계기가 구상성과 직접성을 통해서 마련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14행시에는 지켜야 할 규칙과 관습이 있으며 작자의 입장에서는 쓰기 어려운 시 형태이다. 위의 의역에서 시적 발언 고유의 매력은 증발되어 사라져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산문의 진술로 환원 내지는 축소되어 있는 전언의 골격일 뿐이다. 또 옮긴 이의 일방적 해독에 의해서 본래의 모호성도 많이 훼손되어 있다. 불가피한 시적 손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자의 관찰과 논평에서 삶을 바라보는 어떤 시각의 견고성을 감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과 바깥쪽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착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인간 존중의 덕성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으로 접근하게 된다. 훌륭한 시가 인지의 충격을 준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 자체로서 논리정연한 추상적 명제의 제시와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이 작품에 추상적 관념어나 개념어가 많지 않고 주로 구상적 이미지로 호소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 두어야 할 특징이다.

 

                        고함치며 싸우는 것은 매우 용감하다.

                        그렇지만 내 아느니, 더욱 날랜 것은,

                        마음속에서 돌격하는

                        슬픔의 白馬부대

 

                        이겨도 국민은 보지 못하고

                        스러져도 누구 하나 지켜보지 않는다.

                        그 죽어가는 눈을, 어느 나라도

                        애국자의 사랑으로 눈여겨보지 않는다.

 

                        우리는 믿는다, 새 깃털로 단장하고

                        이런 사람들을 위해, 천사들은 행진한다고.

                        열을 짓고 발결음 맞추며

                        백설의 제복을 걸친 채.

 

                                                                      ----에밀리 디킨슨, 「고함치며 싸우는 것은」전문

 

 

원시에는 <슬픔의 기병대(騎兵隊)>로 되어 있지만 옛적의 기병대가 쉽게 다가오지 않아, 슬픔의 백마부대>라고 옮겨보았다. 56년 의 이 세상 귀양살이에서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남긴 시는 1천 8백 편에 이른다. 대체로 짤막하고 간결한 시행이 그녀 시의 특징이다. 견고한 단순성을 바탕으로 해서 생활 주변의 조그마한 것과 죽음을 지칠줄 모르고 노래하였다. 자기 시를 <세상에 띄우는 나의 편지>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생전에 발표된 시는 일곱편에 불과하며 완전히 세상과 절연한 채 은둔자처럼 살았다.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처지에서 외로운 마음 싸움을 벌이는 슬픔의 백마부대가 그녀 자신을 모형으로 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음은 말 할 것도 없다(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나라의 여류작가 카슨 맥컬러즈Carson McCullers에게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디킨슨에게 있어 마음은 <슬픈 기병>인데 작자의 의도야 어떻든 <외로운 사냥꾼>은 그 변주가 되어 있다).

나라 위해 고함치며 싸우는 병사들은 그 용감성을 칭송받고 애국자와 국민들의 주목을 받는다.그렇지만 고독한 마음 싸움은 혼자서 치러내는 무상無償한 전투이다. 저잣거리 세상사람들의 주목이나 관심의 대상은 아니지만 순백의 제복을 걸친 천사들의 축복을 받으리라고 화자는 믿는다. 그것은 한갓 자기위안일지도 모른다. 산업화의 진척에 따라서 공리주의적이고 유물주의적인 가치관이 팽배해 갈 때 시인은 인간의 내면성도 인간현실의 중요 구성요소임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구원은 내면성을 배제하고 성취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시사한다. 천사와 악마의 사움터가 사람 마음이라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속의 드미트리는 말한다. 슬픔의 기병이었던 디킨슨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고함치며 싸우는 사람들의 용맹을 무수히 목도했으며 그것을 나라 사랑의 눈으로 칭송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 정도로 사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의 덕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만 정도의 도덕적 수준밖에 누리지 못하는 것은 고함치며 싸우는 용자들에게만 관심을 돌리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싸우는 용자들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질없어 보이는 마음 싸움 없이, 다시 말해 슬픔의 백마부대 없이 세상이 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슬픔은 지혜를 가져다준다. 콜리지의 「노수부(老水夫)의 노래」는 호호백발 수부의 경험담을 들은 결혼식 하객이 신랑 집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는 기절했다가

                        혼 나간 사람처럼 갔다.

                        한결 슬프고 총명한 사람이 되어

                        이튿날 아침 일어났다.

 

슬픔과 지혜가 함게 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이 마지막 대목은 결코 낭만주의 고유의 통찰은 아니다. 슬픔에 탐닉해서도 또 거기에 항상적으로 머물러 있어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깊은 슬픔을 통과하지 않은 삶이 피상적이고 얄팍한 것임은 고전비극 이래 그릇 큰 문학이 되풀이 상기시키는 인간사이다. 원한과 분노와 적의와 축축한 감상주의와 냉소적인 재담의 시가 흔하고 참으로 깊은 슬픔의 시가 드물다는 것은 우리 시대와 사회의 황폐성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시인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도 말할 것도 없다.

 

                        예감은 해가 진다는 것을 알리는

                        잔디밭의 저 기나긴 그림자

                        어둠이 막 지나가리라는 것을

                        놀란 풀잎에 알려주는 기별.

 

                                                                   ---에밀리 디킨슨,「예감」전문

 

늦은 하오가 되면 그림자가 길어지게 마련이다. 해질 무렵 잔디밭의 긴 그림자는 곧 일몰이 오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예보이다. 또 곧 어둠이내리리라는 것을 놀란 풀잎에게 알려주는 기별이기도 하다. 신기할 것 없는 일상의 소묘이다. 그러나 긴 그림자를 예감의 보어로 삼으으로써 작품은 예기치 않은 깊이와 무게를 획득한다. <기나긴 그림자는 예감>이라고 했다면 이 시의 효과는 궤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예감이 주어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슬픈 기병의 삶의 예감이 섬세하나 드러나지 않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기나긴 그림자를 접하고 <놀란 풀잎>은 그대로 화자의 자화상이 되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슬픔은 슬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때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자그마하고 섬세한 대로 인지의 충격을 받는다.

 

                        천하 大事가

                        걸려 있다

 

                        뽀오얀

                        병아리떼 곁

 

                        빗물로

                        윤기나는

 

                        빨간 외바퀴

                        손수레에.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빨간 외바퀴 손수레」전문

 

<굉장히 중요한 것이 걸려 있다>고 하고 나서 한 줄 띄우고 빨간 손수레가 등장하여 독자들의 의표를 찌른다. <굉장히 중요한 것>의 산문적 부연이 맥바지는 것이기 때문에 <천하 대사>라고 번역해 보았다. 빨간 손수레와의 대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빨간 외바퀴 손수레는 빗물 때문에 윤기가 나서 선명한 색조를 띠고 있다. 비 개인 직후의 사물의 깨끗한 선명성을 상기하면 된다. 그 곁에는 뽀얀 병아리떼들이 옹기종기모여 있다. 백색과 적색, 손에 쥐면 으깨어질 듯한 병아리와 단단한 손수레가 대조를 이루면서 신선한 눈잔치가 되어주고 있다. 일상적 정경의 산뜻한 제시이다. 정치와 경제와 국방은 천하 대사이다. 개개인의 운명이 이러한 천하 대사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크게 보아 그러하지만 개개인의 삶은 또한 가정, 건강, 수입, 인간관계, 개인적 욕망의 성취와 좌절과 같은 것에 의해서 규정된다. 또 우리의 하루는 날씨, 교통지옥에서의 요행과 불운, 우연한 만남, 횡재나 봉변, 예정의 차질이나 순조로움과 같은 사소한 것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 그런가 하면 자연과의 교감, 책읽기나 예술향수와 같은 의지적 동정에 의해서 우리의 하루는 충만될 수도 있다. 인간만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은 공허한 일상의 수사학이 아니다. 천하 대사가 빨간 외바퀴 손수레에 걸려 있다는 것은 의표를 찌르는 반어(反語)이면서 동시에 반어가 아니다.

인간 행복은 어느 정도 객관적 조건에 의해서 가늠된다. 그러나 행복은 행복 주체의 구성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찾아내고 가꾸어야 할 어떤 것이기도 하다. 일상적 주변에도 행복의 질료는 풍부하게 널려 있다. 세계의 풍요에서 경이를 발견하는 열려진 감수성으 배양은 그래서 중요하다.

 

                        텅텅 비어 있는 여기저기에

                        누구에게나처럼 벌레는 운다.

                        幸福하고 싶었던 그 시절이

                        실은 행복한 시절이었다.

 

                                                                                           - 이형기, 「불행

 

 

 

누구에게나처럼 벌레는 울지만 그 소리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은 아니다. 최악의 사태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최악의 사태는 아니라고 누구인지 잊어버렸지만 말한 사람이 있다. <행복하고 싶었던 그 시절이/실은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한 화자는 아직도 행복하고 싶어하고 있으며 따라서 행복한 시절을 당장 소유하고 있다.

윌리엄스의 <천하 대사가 빨간 외바퀴 손술에 걸려 있다>는 대목은 <인간 행복은 빨간 손수레에 걸려 있다>고 고쳐 써도 무방할 것이다. 또 개인의 행복이 당사자에게 있어 천하 대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말에 저항을 느끼는 공동체주의자나 대사지상주의자라 하더라도 <나의 건강이 천하 대사>란 실감은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천하를 얻더라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란 말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인지의 충격을말할 때 반드시 크고 장한 천하 대사에 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하찮아 보이는 조그만 것일수록 우리에게 그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서정시란 본래 조그마하고 하찮아 보이는 마음의 무늬를 질료로 해서 성립되는 문학장르가 영위할 큰 사업이 못 된다고 방언하는 것은 근거 없는 일도 아니다. 그 점 단순하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위의 시편은 서정시 일반이나 단시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윌리엄스의 시론(詩論)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충격의 뒤란

 

인지의 충격은 통찰체험이다. 심층적으로 오래인 기다림과 검토의 산물이지만 의식과 통찰의 계기가 순간적으로 마련된다는 것은 능히 추측할 수 있다. 영감이니 직관이니 하는 논의의 발생 사정은 대체로 비슷하다. 순간적으로 마련되기 때문에 짤막한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근대에 와서 짤막한 시편만이 진정한 시이며 장시(長詩)란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시론이 있지만 통찰체험을 중요시하는 시는 짧다는 것이 흠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인지의 충격은 비근한 것에서 순간적으로 성취되는 경우가 많다.

 

                      말아, 다락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웨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편인 말아,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잔다.

 

                                                                               --- 정지용, 「말」전문

 

어린이가 화자로 되어 있는 동시 흐름의 시다. 사뭇 몸집과 키가 큰 말을 향해 다락같은 말>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안방의 아랫목에 다락문이 있어 오르내리게 되어 있던 전래 한옥에서 성장한 유년 화자가 <다락같은 말아> 하는 것은 생활경험에서 곧바로 나온 발성이다. 말이 슬퍼 보이는 것은 화자의 <감상의 오류>탓이지만 뒤에 나오듯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검정콩 푸렁 콩을 주마>에 보이는 콩은 말의 건강 식품이다. 콩을 많이 먹이면 말이 기운을 얻어 성질이 세차고 사나워진다. 사라져가는 토박이말의 하나인 <콩기>란 말은 그것을 가리킨다(콩기란 말은 그러나 비유적으로 사람에게 많이 쓰였다. <코 밑이 좀 따뜻해지니까 콩기가 나서 야단이다>라는 투로 쓰였다. 겨울철에 국거리라도 제대로 갖추어 먹어 코 밑이 따뜻해지니까 씽씽 바람을 내며 골목을 누빈다는 뜻이다. 돈을 벌었거나 좀 괜찮은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 갑자기 도도해지는 것을 두고 쓰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모른다고 해서 이 시의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시 흐름 작품의 배경이 되어 있는 사회사적 사실, 전통 한옥구조에서의 다락이나 말의 보건 식품으로서의 콩에 대한 정보는 작품이 지닌 지극한 자연스러움을 감득하는데 필수적이다. 제작 이후 60여 년의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요즘 어린이나 젊은 세대들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 스며 있는 자연스러움의 결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비친다. 공간과 시간이 아득히 상거해 있는 외국 시의 이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국면이다.

이 작품의 최고 순간은 그러나 마지막 두 줄에서 온다. 모든 짐승 가운데서 소나 말은 사람과 가깝게 생활하는 <사람편 인> 짐승이다 그런데 이 마소는 일찌감치 육친과 떨어져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다. 어미와도 헤어져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밤이면 먼데 달을 보며 자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작품을 읽고 필자는 강렬한 인지의 충격을 경험하였다. 그 후 강아지를 비롯한 모든 가축이 고아로서 성장하고 혈육과 나뉘어 외톨박이로 살고 있다는 측은감을 설하하는 어떤 경전의 대목에서도 이 작품에서 받은 충격과 감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이유는 설명할 수있을 것 같다.

사람은 가축 가금을 이산가족으로 만들고 <사람 편>으로 만든다. 집에서 기르는 망아지나 송아지는 모두 강제된 고아로 산다. 이 사실의 인지가 깊은 충격과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고아공포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사실 조실부모란 것은 슬픈 명운의 으뜸 가는 조건이었다. 조실부모까지 가지 않더라도 모친과의 사별만으로도 슬픔 명운의 그림자는 넉넉하게 드리워지는 것이다. 고아공포증이나 모친사별공포증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데렐라」에서「콩쥐팥쥐」에 이르는 의붓딸의 얘기나 「어머니를 찾아서 3만리」와 같은 생별(生別)의 동화책이 그러한 공포증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또 전시하에서 보내는 유년경험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차대전 말기의 궁핍체험과 방공훈련과 실제 야간 공습경보의 경험은 있을 수 있는 참사와 모친 생사별의 가능성을 불안공포증으로 확대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깊은 심층적 차원이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다.

괴테는 『시와 진실』제1부 제2장에서 소년시절의 경험을 꽤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프랑크푸르트의 중산계급 출신 변호사란 사실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자주색 귀족의 피가 자기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진짜 조부는 귀족이고 집안의 조부는 명목상의 대행자라는 동년배의 악의에 찬 얘기를 듣고 지방 유지의 집에 걸려 있는 귀족의 초상화에서 자기 부친이나 자신과 닮아있는 모습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한다. 자기 개인사의 변조를 상상해 본 것이다. 그러나 소년 괴테의 개인사 왜곡 유혹은 그만의 것일가?

프로이트가 짤막하게 언급하고 말았지만 중요성을 부여하는 후발 이론가에 의해서 더러 거론되는 것에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 혹은 가족소설이란 생각이 있다. 주체가 양친과의 관계를 상상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 활용하는 망상을 가리키는데 그 망상의 기초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한다. 비천한 출생이나 불운 혹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치욕을 설명하려는 기도에서 어린이의 나르시시즘이 멋대로 구성한 출생에 관한 가공적 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면 극복하지만 신경증 환자에게는 늘 따라다니기도 한다는 것이다. 괴테가 실토하고 있는 것이 이 <가족 로맨스>의 구체적 사례인 셈이다. 귀족의 버린 자식이나 사생아가 나중에 신원이 판명되어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동화나 소설은 아주 흔하다.

자기 내력을 묻는 어린이에게 흔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렸다. 다리란 말의 양의성(兩義性)에 뵈추어 본다면 황새가 물어왔다는 서양 쪽의 답변보다는 진실한 답변일지도 모른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단서는 어린이에게 제가끔 가족 로맨스를 구상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리 사이에서 가족 로맨스가 과연 널리 창작되는 것인지에 관한 천착을 해본 일은 없다. 그러나 출생 이전에 관한 전사적(前史的)가족 로맨스보다는 출생 이후와 관련되는 이산가족적이고 부모 상실과 관련되는 가족 로맨스는 불안과 공포의 형태로 비교적 널리 상상적으로 제작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이것은 우리 세대 특유의 공통경험일지도 모른다. 유소년기를 전시하에서 보냈다는 특수성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해방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도 전시 못지 않은 불안시대였다. 1946년 호열자가 전국에 퍼져 전전긍긍케 하였지만 『정감록』을 따랐다는 괴이한 속설이 전국에 퍼졌다. 백리지경에 인적이 끊긴다든가 수탃소리가 그친다든가 하는 유언비어가 조금식 내용을 달리하며 퍼졌고 그에 대한 예방책이라는 해괴한 방책이 마을마다 강구되기도 하였다. 반세기 동안의 사회 발전은 이러한 정감록적이고 종말론적인 유언비어가 정치 비화(秘話)나 정계 이면에 대한 <카드라 통신>에 의해서 대체되었다는 점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신분상승적이고 낙관적인 서양 쪽의 전사적(前史的) 가족 로맨스보다 우리 쪽 것은 한결 비관적이고 현실반영적인 후사적(後史的)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고아나 부모 상실과 관련되는 가족 로맨스가 심층적인 차원에서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지용의「말」이 강렬한 인지의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지용은 뒷날 동시에서 보여준 측은과 연민의 정을 「백록담」에서도 보여준다.

 

                       첫새끼를 낳느라고 암소가 몸시 혼이 났다.얼결에 山길 百里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흰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마고 매어달렸다. 우리 새끼 들도 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말」에서는 다분히 유년 화자의 고아공포증이나 부모상실공포증이 기반이 되어 있다. 「백록담」에서는 소생들을 고아로 남겨놓을지도 모른다는 기아(棄兒)공포증 혹은 단명(短命)공포증이 깔려 있다. 이산가족 동물에 대한 연민과 측은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정서적 심층은 역전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도 40전후였으리라는 사회사적 사실을 상기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한마디의 말이나 글귀나 혹은 책 한 권이 삶을 바꾸어놓았다는 술회를 더러 듣게 된다. 더러는 과장도 있고 또 심층적 차원에서의 준비태세를 간과한 토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시나 한 권의 비극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놓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동서의 지적 전통이 시와 문학을 숭상한 것도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훌륭한 시는 인지의 충격을 준다. 그 점 「말」은 손끝에서 나올 수 없는 진정성의 시이다. 

미국 의회에서 노예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은 1807년 의 일이다.  퀘이커 교도들을 위시한 인도주의자들의 노력이 가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동기는 인도주의적 고려에서 나온 조처는 혈의 강도 때문에 미국민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속임수로 투생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나폴레옹은 하이티 반란을 완전 진압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고 프랑스는 1803년 루이지애나 주를 미국에 헐값으로 매각하였다. 이어서 계속적인 아프리카 노예 수입이 장래 공포의 화근이 된다고 생각한 결과 노예무역을 금지 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법안의 통과는 미국 국내에서의 노예거래를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흑인노예들의 출산장려운동이 벌어지고 열세 살이나 열네 살짜리 어머니가 늘어났다. 스무 살에 5회 출산 기록을 세운 젊은 어머니의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10회 출산 기록을 세우면 노예의 신문에서 해방시켜 주는 특전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버지니아 주의 경우 흑인 갓난이의 가격은 2백 달러에 이르렀다 한다).

출산 장려를 통해 양산된 노예들을 거래하자면 자연 가족들을 생이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족이산을 기켜 따로따로 떼어서 거래하는 경우에는 한 가족을 모개로 거래할 때보다 비싸게 호가(呼價)할 수 있었다. 여덟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어린 흑인들을 구하는 광고가 흔하였다. 어린이 흑인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인도 생겨났다.

이산을 통한 분리 판매에 대해서 인도주의자 쪽의 비난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 노예상인들은 흑인 사이에선 가족관념이 희박하며 따라서 생이별에 전혀 무관심하다고 강변하였다. 흑인노예를 동물 수준으로 격하시킴으로써 반인간적 행위를 합리화 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지용의 「말」과 「백록담」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작품을 통해 인지의 충격을 받은 정신은 반인간적인 합리화에 터져나오는 분노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정의에 대한 강렬한 희구도 이러한 인지충격의 누적에 기초한 것이고 인문주의 교육의 유효성이 있다면 문학의 이러한 국면과 관련될 것이다.

흑인들의 가족관념이 희박하다고 강변한 노예상들이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흑인가족의 정경을 목격하였을 터이요 또 도망 노예는 대체로 가족 재회를 위해서 목숨을 건 모험길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허위선전은 자신마저 세뇌하여 자기기만에 빠져버리게 하는 법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문학이 주는 인지충격이 무슨 효용이 있을 것이냐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인간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겠기 때문이다.

역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빈번이 인간됨의 수수께끼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600만의 유태인을 체계적으로 제거한 나치 정부는 1936년 1월 14일자로 된 어류 및 냉혈동물에 관한 법규 속에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인간 소비를 위해 살해하려는 조개, 새우 등 갑각류는 가능하면 강렬하게 비등하는 물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동물을 차거나 미지근한물에 넣은 후에 물을 끓이는 것은 금한다.

 

동물을 요리 할 때 안락사 시켜야 한다는 극히 인도주의적인 조항이다. 하인리히 힘러는 돌격대장을 거쳐 내무장관을 지낸 나치 지도자의 한 사람인데 이러한 대화가 남아 있다.

 

                       불교의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아직도 조그만 방울을 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감동 받았어요. 자기가 밟을

                       지도 모르는 동물들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선 아무 생각없이 달팽이나 벌레를

                       함부로 밟아버리거든요.

 

잔학한 테러를 총지휘한 냉혈한으로 묘사되는 힘러의 말인데 성자의 말씀처럼 들린다. 인간의 수수께끼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수수께기 앞에서 망연자실하면서도 우리들은 그러나 인문주의적인 꿈을 버리지 못한다. 버릴 수도 없다. 천하 대사의 정의로운 횃불은 개개인의 선의의 촛불의 뒷받침 없이는 허황된 호들갑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경험의 시학)- 유종호/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