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정 2008. 8. 17. 12:07

- 독

 

             장만호

 

 

 

금 간 속도로 저녁이 빨려들어가고 있다

 

누군가 밤새 길어다 부은 물이

긴 여름 장맛비가

장맛처럼 짜디짠 한 여자의 일생이

저 속으로 들어갔다

빠져나왔을 것이다. 나는

속을 모르고

 

나는 어떤 저녁인가

어떤 빛으로 물들어보는 일은 많은데

오랫동안 부글거렸거나 얼고 녹았을 내장(內臟)의 시간들이 서서히 빠져나간 후

수면 내시경을 받고서는 주름진 내장(內臟)의 굴곡을 다른 꿈속인 듯 바라보는 늙은 어머니처럼

그걸 지켜보며 슬퍼서 슬퍼서 심장이 된* 어느 아들처럼

 

독은, 가만히

가로수에 머리를 대고

제 안의 늦은 저녁을 사유하고 있다

 

누군가 몰래,

내가 품은 저녁을

내 부재의 실금을 찬찬히 들여아보고 있다

 

 

 

                         * 이 구절은 정지용의 [파충류 동물]에서 빌려왔다. "나는 슬퍼서 슬퍼서/심장이 되구요."

 

 

 

- 장만호 시집 : 무서운 속도 / 랜덤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