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항아리.../시시한 수필 -

내 인생의 사랑.... 문학과의 동행

문선정 2007. 1. 4. 05:08

내 인생의 사랑.... 문학과의 동행

 

 

-문숙자

 

 

 

 

사랑에 빠지면 유치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은 유치한 사랑을 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닐까. 살면서 사랑이 빠진 일상이라면, 얼마나 맥 빠지고 지루할까. 유행 따라 변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고여 있는 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치함은 오래가지 못하고 건성건성 해 진 사랑을 무기로 바닥에 썩은 이물질을 퍼내고, 새로운 물고를 트는 일로 생을 받치는 것이 “참사랑”일 것이다. 시간을 쫓아 뒤로 걷는다 해도 지나간 것을 잡을 수 없듯, 시간여행의 존재 같은 미련에 매달리는 일은 시간낭비다. 유치함으로 달콤했던 시간은 고이 접어 추억이라는 서랍 속에 감췄다가 살짝 꺼내보는 일로 가슴 저리더라도 담담하게 참사랑을 옆에 끼고 걷는 일로도 우리는 충분히 충실할 수 있다. 영웅적이고 남성우월주의가 강한 남자에게 여자의 생을 고스란히 기대야 하는 뒤틀린 관습에 모든 여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선물한 2005년 더위를 달래 준 삼순이. TV속 인물이라 현실감이 떨어지지만,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고로한 관념은 빼 버렸다. 그녀가 뿜어내는 재치와 푼수 끼만으로도 드라마의 인기몰이에 성공했으니, 숨어있던 “원조 삼순이”들이 스스로 손을 들고 나온다는 것이 여자들의 일상에 명랑함을 배달해 준 것 같은 참 좋은 생각이 들기에, 참 좋은 작가가 쓴, 참 좋은 TV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물이 가득 찬 가슴에 차돌멩이 하나를 던져 후련하고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메시지를 남기고 막을 내렸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무심결이었지만 습관처럼 연필을 들고 적었다.

 그래, 마지막 날까지 예측불허인 삶.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추듯, 사랑하듯, 노래하듯, 마지막 날인 것처럼... 진실하고, 담백하게... 중얼거리면서... 솔직하고 담백한 삶이란, 우여 곡절한 고통과 기쁨이 엇갈리면서, 타인의 생각과 내 생각이 어우러져 잘 깎고 다듬어 멋있게 빛나는 원석 하나 만드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닐까. 드라마 한 편이 이 시대 여성의 감수성을 속 시원하게 풀어냈다.

 

 이런 감수성을 해체해 보기에 좋은 여성들만이 모여 사는 문학 동네가 있다. 마을 입구엔 [소요문학]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는 마을. 내가 이 마을에 머물고 7년이 되었다. 몇 몇 문학을 꿈꾸는 여성들이 서로 정을 붙이고 한데 어울려 사는 일은 너무나 자명하다.

 

 드라마 속의 대사 한 마디에 반짝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권의 두꺼운 책 속에서 가슴에 새겨둘만한 낱말을 찾아 밑줄을 긋는 이유에 대하여, 한 편의 시를 읽고 가슴 토닥거릴만한 사연에 대하여, 한낱 사소한 풍경이 내 곁을 스칠 때, 누구는 이러저러한 정서를 심어 밭을 일구었으며, 마을의 농작물의 풍, 흉년에 대하여 논하는 문우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인연이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으로 잠깐 머물다 떠나간 사람들. 마을의 원주민으로 뿌리를 내린,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람들. 이제 막 자신의 꿈을 심어 보겠노라고 보따리를 풀어헤치는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겉멋이라도 들을라치면 후덕함 속에 들어있는 따끔한 충고 한 마디 해 줄 수 있는 마을 이장님 같은 사람 하나 있었으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주민들의 삶은 소박하지만 열정 없이 지은 농작물에는 눈길이 머물지 않는다.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밤이면 부지런히 몸을 털고 일어나 움직여야 하고, 모두가 잠들어 혼자서 떠들어대는 TV소리에 부스스 눈 비비면서도 뭔가를 연구해야 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남보다 먼저 보려고 시간의 게으름을 털어내는 열정으로 우리가 씨 뿌리고 거두어들인 결실은 시장에 내 놓고 맛과 품질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사상을 닮고자 그의 색깔을 모방하는 패러디 속에서 더 많은 걸 배워내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사치라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말자. 문학 동네의 현실에 맞추어 살면서 서걱거리는 행복 한 주먹이라도 움켜쥐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하기에.

 

 작년 봄 무렵이었던가.

 어느 유명한 시인의 “이 시대의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 한마디는 화끈 달아오르는 내 얼굴에 매를 더하는 채찍질이었다. 화살처럼 뾰족한 말을 톡 쏘아 내 가슴에 꽂은 시인은 꿈적도 않는 커다란 바위였다. 나는 바위에 살짝 닿기만 해도 금이 가버려 곧 곯아버릴 계란 같은 존재였다. 괜히 바위에 앉았다 된통 미끄러진 충격 때문인지 질병처럼 방문하는 마음 달뜸이 기쁘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채찍질을 당했던 따끔거림으로 그저 아프기만 하다. 다행히도 계절은 이런 내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 해 주니 얼마나 친절한가.

 

봄이면, 아지랑이 피어오름에 바위가 준 상처에 어지럼증으로 비틀거릴 것이다.

요즘은, 그물 같이 촘촘한 방충망 들러붙은 한여름 매미가 종일토록 비웃는다.

가을엔, 해 질 녘 쓸쓸함에 넋을 빼앗기곤 이젠 어쩔거나 하는 마음일 것이다.

겨울엔, 추위에 겁먹어 얼얼한 고드름을 보고 다가올 봄도 엉거주춤 할 것 같다.

 

 어쩌나, 죽어가는 문학의 시대에 우리도 끼어 있단다. 아니, 우리는 벌써 좀비가 되어 남에게 보여 지지 않는 나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커다란 바위가 건드려 준 의미심장한 말에 대하여 해체해 볼 때이다. 이 마을에서 살아야 하는 목적과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시대에 밀려 버려지지 좀비 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슬그머니 마을을 빠져나가는 방법도 괜찮겠지만, 이 마을 저 마을서 들리는 달콤한 칭찬에서도 숨어있는 비판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잘 못 이해한 구멍을 찾아 시대에 맞는 감수성을 찾아내어 빳빳이 고개 들고 맞서는 배짱은 어떨까.

 휘두르는 채찍질에 맞기만 하다, 순간 피하려고 뭐든 붙잡으려고 기를 쓰는 사람은 오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남의 말 한마디에 내 스스로 선을 그어 분리하고, 나만의 방에 갇혀 ~가 되고 싶다는 희망보다는, ~를 해도 소용없다는 섣부른 판단으로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일랑은 접어 버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은 것처럼, 와글거리는 글자들과 함께 내 가사노동에 취하여 춤을 출 것이다.

(어릿광대의 짓거리에 불과하더라도, 어쩔 수 없느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듯, 내 사랑은 갈증에 허덕거릴 것이다.

(꿈인들 어떠리. 지독하게 중독된 사랑은 꿈에서라도, 상처 받기를 원하느니.)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를 부르며 도를 닦는 시간을 갖자.

(간신히 음치를 탈출하기 위한 연습일지라도, 목청을 돋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돈보다 더 소중한 사랑을 위하여, 환영 같은 물질세계를 잊고 하얀 밤을 보낸다.

(상처에 상처가 더하더라도, 사랑은 먹을수록 배가 고프니.)

 

 아무도 바라 봐 주지 않는 사랑을 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미어질 듯 밀고 들어오는 상처가 깊을수록 스스로 뛰어 든 사랑놀이의 상처는 차라리 고질병인 피부병이기를 바란다. 피부병은 늘 근지럽고 따끔거리기에 긁어 피가 나도록 후벼 파는 중독이기를. 피 냄새나는 상처에 더 마음이 가고 손 가 듯이 내 피는 아파서 늘 징징대며 울기를 바란다. 뚝 그친 후의 가슴 후련함에 맑은 산소를 들이키자. 나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인 염세주의자가 되어 있는 것을 모른 채 그렇게 살고... 지고...

 

 날마다 오는 아침은 밝을 수밖에 없기에 오늘 하루도 쉬지 않고 걷는다. 어둠 속에서도 내일은 어느 방향으로 갈 길을 준비한다. 날마다 걷는 길은 날마다 걷는 길이 아닌 것처럼, 날마다 찾아오던 하루가 언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울컥 하여 선택한 사랑이 아닌,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내 사랑을 선택하여 [소요문학]의 원주민으로 한 발짝 더 내딛는 용기를 내 봄이 어떨까.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