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니
조용미
까마귀는 흰 피를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까마귀의 피로 나는 무엇을 쓸까
검은 종이에 피보다 붉은 어떤 말을 적을 수 있을까
내 안에 또 무엇이 들어왔나 보다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수로의 버드나무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달빛이 물밀 듯 방 안으로 들어오는
조그만 방을 하나 가지고 싶다
그 방에( )를 옮겨가도 좋으리라
눈부시도록 긴 목을 한 큰고니는
목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수면 위에 떠 있었다
슬픔 때문에 목이 점점 더 길어지는지
멀리 있는 큰고니를 오래 보느라
눈이 깊어지고 목이 길게 늘어낫다
하루 사이 목이 길어지고, 겨울 내내 목이 길어진다면
날지 않는 새가 가진 날개의 무게를
내가 대신 등에 질 수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조용미 시집 : 나의 별에서 핀 앵두나무는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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