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달 달
유종오
아닌 밤에 떠오르는 햇덩이같이
바야흐로 행복의 얼굴과 같이
땡그란 보름달보다도
우리들 남루한 스무 살 적
연상의 여인과도 같이
반 둥글 넓적한 열하룻달보다도
한을 품고 휘어진 비수 같은
초사나흘 초승달에
내 마음 스치더라 내 마음 실리더라
오월의 '유심 문학의 현장'은 'ㅇ초사나흘 초승달'에 마음을 실은 유종호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그저 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려 한다는 서두와 온화한 미소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난다.
좋은 시라고 하는 것은 획일적으로 이러해야 한다는 것이 없고, 다 제각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다. 이것이 제가 시를 보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어떤 시는 쉬워서 좋고, 어떤 시는 어려운데 매력이 있고, 또 어떤 시는 외우기가 좋기 때문에 좋은 시고, 어떤 것은 쉽게 외워지지 않기 때문에 않기 때문에 좋은 시가 있는 것입니다. 시를 한참 읽을 적에 만해 선사의 시 <알 수 없어요>에 매혹 당했습니다. <알 수 없어요>에는 정말 무엇인가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 시는 보통 사람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어떤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듯해서 계속 좋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 중에서 최고 경지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시는 일률적으로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시는 대개 공통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고, 말이 장황하고, 독자적인 요소가 전혀 없고 또 나오는 표현들이 너무나 규격화되고 상투적이라는 것 등입니다. 특출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쉬 기억되지도 않습니다.
소리와 뜻의 조화
소리와 뜯ㅅ이 조화되어 있는 시가 좋은 시라 생각합니다. 요즘 벼롤 거론하는 이가 없는 엘리엇(T.S. Eliot)은 시인이나 독자가 청각적 상상력을 풍부히 가지고 있어야 제대로 좋은 시를 쓸 수가 있고, 또 좋은 시를 알아볼 수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요컨대 청각적 상상력은 하나의 말이 가지고 있는 울림이나 소라, 즉 음악적인 요소를 알아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스빈다.
그런데 소리는 참 좋은데 뜻은 약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오장환과 박인환의 시는 매우 음률적입니다. 그런데 뜻이 조금 약해서 울림 또한 얼마쯤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뜻과 소리가 균형 잡혀 있고 조화로운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요? 그런데 <님의 침묵>과 <질마재 신화>는 음악적인 요소가 비교적 약한 산문시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적인 요소가 부족해도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진한 깊이가 있기 때문에 저는 <님의 침묵>과 <질마재 신화>는 조금 예외적인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시와 스노비즘(snobbism)
곰브리치(Emst H.j. Gombrich)의 《서양미술사(西洋美術史)》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림을 제대로 볼 줄 알기 위해서는 누구나 한번 읽어보아야 할 명서라고 생각합니다. 곰브리치의 말을 따르면 당신은 무슨 그림을 좋아하느냐, 이 그림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 눈이 즐겁기 대문에 이 작품을 좋다고 하면 혹시 천박하다고 하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좋다고 하지않고, 잘 모르는 작품이나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작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박한 스노비즘(xnobbism)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음악을,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난 음악도 알고 그림도 안다 하는 티를 내기 위해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노비즘입니다.
그런데 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첫 시간이 되면 왜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가, 좋아하는 시나 작가에 대해 물어봅니다.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가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 대부분이 좋다고 말하는 시인이 김수영입니다. 좋다, 그렇면 김수영의 시 중에서 무엇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 다음에 말이 꽉 막히는 겁니다. 정말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 좋아하는 시인의 시 중에서 한 편 정도는 외울 수 있고, 다 외울수는 없다고 해도 좋은 구절은 기억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학생은 시를 보는 안목이 흐리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시를 정말 좋아하면 외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옛날에 민요나 시가 산문보다 먼저 생겼습니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모든 것은 기억에 의존했습니다. 쉽게 기억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시였지요. 호매로스의 서사시를 보면 배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배를 만드는 방법을 시로 발달된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좋아하는 시를 한 편도 외우지 못한다는 것은 시를 좋아하지 않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조금 당돌한 편이지요. 그러면 선생님도 한번 외워보라 이거예요.(웃음) 그래서 나는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같은가, 가르치는 사람이 못해도 배우는 사람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할 수 없이 외워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시를 많이 외우고 있다 하는 뜬소문이 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외우는 시를 외우면 그것은 인정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안 읽는 시를 두서너 개만 외워 주면 다르게 봅니다. 여기서 제가 한번 암송해 볼까요?(웃음, 박수) 일부러 남들이 잘 외우지 못하는 시, 그리고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시, 미당의 <풀리는 한강가에서>를 암송해보지요.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 보라 함인가
황토 언덕
꽃상여
떼 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음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이 시는 1949년인가 《신천지》라는 잡지에 발표된 것으로 중학교 때 서점에서 처음으로 본 이후 지금까지 좋아하는 시입니다. 시골에서 자랄 당시 놀잇감이 별로 없었는데 문학이 제게 좋은 놀잇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생활 형편도 좋지 않아 책을 사보는 것은 쉽지 않아서 찾아낸 방법이 책방에 가서 그 자리에서 시를 외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게 된 시가 이 시인데 느낌이 유다르고 공감이 가서 대번에 외우게 되었지요. 좋은 시는 금방 외워집니다. 미당의 후기 시편은 초월적인 세계관이 주가 되고 생활인의 감정이 없는데 이 시는 세상 살아가는 사람의 애환이나 정감이 느껴져서 공감이 갔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지요. 또 매우 음률적인 시입니다.
내 마음의 시
사실 시는 제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잉ㅂ니다. 영화도 좋아하고 음악도 시 이상으로 좋아합니다. 시 읽는 시간ㄴ보다 음악들은 시간이 훨씬 많지요. 그런데 어찌어찌하다보니 역할 분담을 할 때 학교에서도 시를 맡기고 글을 쓰게 될 때에도 시에 관해 쓰라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오늘 이 자리에까지 떠밀려 흘러오게 된것입니다. (웃음)
얼마 전에 어느 글을 보니 이시영 시인이 어릴 적에 박목월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창비 쪽의 현실참여파 시인들은 박목월을 좋아했다는 소리를 별로 안 합니다. 설사 좋아했다 하더라도 현실과 동떨어졌다 해서 이야기를 안 하는데, 이시영 시인은 어릴 때 박목월을 좋아했다고 섰더군요. 특히 공감이 갔던 부분은 <귀밑 사마귀>는 별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시를 또 암송해 보겠습니다. 말하자면 암송해 봄으로써 박목월의 모든 시를 외운다 하는 헛소문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지요.(웃음)
잠자듯 고운 눈썹 위에
달빛이 나린다
눈이 쌓인다
옛날의 슬픈
피가 맺힌다
어느 강을 건너서
다시 그를 만나랴
살눈썹 길슴한
옛 사람을
산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봄마다
도사리고 앉은 채
도사리고 앉은 채
울음 우는 사람
귀밑 사마귀
이 시는 목월 시편 가운데서도 유니크한 시인데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좋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시를 알고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시영 시인이 이 시를 좋다고 한 것을 보고 그에게 어떤 인간적 문학적 믿음이 가는 거예요. 박목월의 시는 외우기 좋아서 솔직하게 말하면 《청록집》의 목월 시편은 다 외웠습니다. 물론 문학소년 시절 얘기지요.
정지용 시 중에서 좋은 시가 많이 있지만 별로 거론하는 이가 없는 시에 <경도압천(京都鴨川)>이란 것이 있습니다. '압천'이라는 것은 가모가와(Kamogawa)인데, 처음에 이 시가 《시문학》에 나왔을 때에는 <경도압천>이라고 발표되었었지요. 그런데 시집에 낼 적에는 교토를 빼버리고 <압천>이라고나왔어요. 그런데 '압천'이라는 것은 일본말이라 어감이 이상하죠. 가모가와라고 읽어야 하는데, 젊은 나그네의 시름을 읊으며 "뜸부기 홀어멈 울음 울고"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냥 뜸부기가 우는 것이 아니라 홀어멈이 울었다는 것이 묘미가 있지요. 또 매우 음률적입니다. 그 밖에도 정지용에게믄 명편이 많지요.
그리고 미당의 시 중에서 또 <민들레 꽃>이라는 토속적 관능 세계를 다룬 시가 있는데 좋아했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따라서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좋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꾸 이 시를 암송하면 장기(長技)자랑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암송 않겠습니다. 시를 다 외우는 것은 아니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많이 암송한다는 첫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으슥한 작품을 외워보는 것이지요. 학교에서도 박학한 사람이라는 헛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모른 것이 없다고 , 그런데 정말 그런 게 아니고 조작된 것이지요. 많은 것을 안다, 이런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웬만한 것은 아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 만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모든 사람이 모른 ㄴ것을 '그것은 그게 아니고 이거다'하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에 잠자코 있으면 아! 저이는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가만 있다 이런 인상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웃음) 이 방법은 제가 오랫동안 실험해서 터득한 방법입니다. 가만히 있음으로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면서, '아! 저 사람은 다 안다'는 거짓 인상을 주는 것, 남들이 외우지 못하는 으슥한 시편을 외워서 모든 시를 다 외운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 지금까지는 일단 성공을 거뒀는데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마련입니다.(웃음) 드러나기 전에 자수하고 고백을 해서 사실 그게 아니다 하는 것을 차츰 이야기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웃음)
시는 기표(記表)로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주로 메시지 즉 전언입니다. 그런데 김기림의 <태양의 풍속>과 박두진의 <해>는 '해야 솟아라'라는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시는 세계가 전혀 다릅니다. 시에서는 메시지, 기의(記意)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표(記表)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쉬르 언어학에서는 어사가 기의와 기표로 구분되고 일반 산문에서는 기의가 우위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시는 기의보다 기표가 우위가 되는 언어 표현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할 때 '나그네'란 말이 여행자란 뜻이라 하여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여행자" 하면 시의 세계가 무너집니다. '여행자'는 '나그네'의 느낌을 살려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기표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기표가 아니라 기의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경주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몇 사람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하는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나운서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는데 아나운서가 한 말 그대로 한번 복창을 해보라 하면 못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억을 할 때 기의만 기억하지 기표는 기억하지 않기 대문이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기의보다 기표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시 중에서 김기림의 <향수>가 있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저 산 넘어 또 저 구름 밖/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이라는 부분에서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는 기의 위주로 번역하면 함경도입니다. 그런데 "나의 고향은/ 저 산 넘어 또 저 구름 밖/ 함경도"하면 시적 효과는 거의 전멸하고 맙니다. 때문에 시는 기의보다 기표가 우선권이 주어지는 언어 표현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표상의 미묘한 차이에서 좋은 시가 생깁니다. 이런 미세하고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감각을 길러가는 것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상호텍스트성
옛날에는 신이 세계를 창조하듯 시인은 시를 창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무에서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해낸 것과 마찬가지로 시인도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작품을 창조한다는 점에선 동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나 시를 신비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지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시인이 무에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있던 문학 작품에서 짜깁기를 해서 결국 작품을 만든다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시를 하나의 생산과정, 조립 과정으로 보는 시각들이 많아졌습니다. 문학 작품에서 읽은 어떤 내용이나 표현에서 영감을 받고 거기다 자기 경험을 더하여 조립해서 만드는 것이 문학 작품이란 것이지요. 이른바 상호텍스트성이란 것이지요. 쉽게 이야기하면 옛날 시를 인용하는 것도 일종의 상호텍스트성입니다.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서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라는 대목은 고려시대 이조년의 시조에서 따온 것으로 이것은 선인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의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시는 또한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라는 부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박목월의 시 <나그네>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나그네>가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답시의 형식이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님의 침묵》에 실려 있는 만해의 <비밀>과 《원정》에 실려 있는 타고르의 시 <24호>에서도 잘 드럽니다.
먼저 만해의 <비밀>만 읽어보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타고르의 <24호>를 읽어보세요. <24호>를 읽고 <비밀>을 읽으면 <비밀>은 <24호>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밀>이라는 시가 아주 쉬워져요. <비밀>은 만해가 타고르의 시에 감탄하면서 타고르 시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답장을 보낸 것임이 거의 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 모든 시는 서로 관련을 갖고 있다. 즉 상호텍스트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문학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청중과의 대화
- 선생님께서도 시를 스시는데 시를 쓰시게 된 계기와 시인으로서의 감회나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 시를 좋아해서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썼습니다. 지금은 거의 잊었지만 한국 시는 웬만한 건 다 외웠었지요. 그 때만 해도 용돈도 궁했던 터라 서점에 가서 몇 번 읽으며 그냥 외워 버렸는데, 시를 많이 외우니 자연히 나도 쓰고 싶은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시를 썼는데 당시에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요. 16헤 때 한국전쟁이 났는데 이후로 시련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 겨울 그리고 가을》이라는 회상록에도 적었지만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에 문학을 한다는 것에 회의를 가졌었지요. 겪은 현실과는 너무나도 유리되어 있는 듯 보여 자기반성을 하면서 생각해 보니 이 세사엥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더군요. 그 중에서 제일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공부였습니다. 공부를 하라 하면 시험은 잘 볼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가 사는 길은 공부 잘하는 길밖에 없다 해서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이때부터 시 쓰는 것은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도 글 잘 쓴다 하는 소리보다도 '수재' 소리를 듣고 싶은 허영이 있었어요. 실은 중학교도 수석으로 들어갔거든요.시골이었으니까요. 그러다 환갑이 다 되어서 시랍시고 써 보았습니다. 영어 선생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타이프는 쳤지요. 영어 시험 문제도 내야 하고 하니까요. 그러다 1989년에 처음 PC를 샀는데 워드프로세서를 이용할 때 영어만 이용했지요. 그러다가 1990년대 중ㅇ반에 우리말을 치기 시작했어요. 우리 말을 치면서 이것저것 써보다가 옛날에 해 보던 시를 한번 써보자 해서 워드프로세서 연습 삼아 치다보니 겨울방학 동안에 30편 가량 쓰게 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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