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세상 1/문우들과 함께

그 후, 그리고 일 년... "나의 하루는 나비처럼 가벼워서"

문선정 2008. 12. 18. 22:41

2008년 12월 18일 수요일.

 출판기념및 작품 시낭송회를  클래식 카페 콘체르토에서 하였습니다. 

나호열 시집

『타인의 슬픔』

 

시원문학회 2008년 작품집

『나의 하루는 나비처럼 가벼워서』

- 나의 하루는 나비처럼 가벼워서    

        

                                                 문숙자

 

나비, 움직이네

 

시간이 가기 전에

서럽고 쓸쓸한 허물을 벗어보자고 약속을 했더랬지

죄다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낮은 꽃들이 출렁거리는 숲은 어디로 옮겨 놓았을가

바람의 속도에 맞추어 들판을 날아야 한다

잔물결 일으키는 바랑이풀에 앉아 쉬었다가도

다시 야무지게 날아올라

낮은 꽃들이 출렁거리는 숲에서 다시 산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꽃 진 나무

푸르고 붉은 저마다의 나뭇잎들의 하들하들한 숨소리

세상엔 너만 시리고 서러운 것이 아니라고

세상의 어느 곳이든 심한 비바람에 두려워 떨기도 하고

다시 또 자글자글 몸 녹여주는 빛이 들어오면

처음부터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

꽃 진 나무 깊숙한 목구멍 속으로 마른 침을 꼴깍 넘긴다

 

천지 사방이다 보이는

나의 하루는 나비처럼 가벼워서

난분분 꽃가루 날리었던 길을 찾아 헤맨다

 

 

- 꽃나무 일기

 

                                 한옥순

 

고요함이 깊어가는 겨울마당 한 켠에

아주 오래된 시집 같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맨 몸 채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가지마다 눈송이를 흰꽃송이처럼 달고는

버거운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제 발등을 내려다봅니다

그러더니 눈 덮인 발치에다

휘파람소리로 입김을 불어

文字를 만들어갑니다

그 모양새가 꽃나무의 日記 같기도 하고

어딘가로 보내는 편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봄이 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먼 것 같은데

어쩐지 올 겨울은 유난히도

발등이 너무 시리다고

첫 줄에 씌어있더니

꽃 진 자리가 아릿한 것 같다고

꽃 필 자리가 자꾸만 간지럽다고

마지막 줄에 적어 놓습니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려니

쓸쓸하고 또 쓸쓸한 넋두리인양

적막하기가 참 그지없습니다

언제 왔는지 그림자나무 하나가

꽃나무 곁에 살그머니 와 섭니다

 

꽃이 피어도 꽃이 져도

꽃 나무는 꽃나무입니다

홀로 서 있어도 꽃나무입니다

 

 

- 잠시 쉬어가라는

                       

                                   조광자

 

포매리 이정표에서 여기 까지 왔다

길은 여럿 있었으나 

앞만 보고 달려온 길

이 길을 따라온 이유를 알 수 없어 

잠시 머뭇거리는데

언덕 위 바다에서 물에 누운 부처님을 만나다

 

길은 끝이 없으니 잠깐 쉬어 가라는 말씀이 아니더라도

여기서 한나절 道나 닦아볼까나

내려놓아야 할 서푼 어치 여비를 가슴에 쟁여 들고

천 개의 눈과 손으로 중생을 구제하신다는 

부처님을 만나러 물길을 들어선다

 

입구에서 어느 보살님의 말씀이

용궁암 연화법당에 백일기도 올리고

복을 받아 가라 하신다

축원비: 15만원

철야기도비: 5만원

입시기도비: 10만원

동참기도비: 10만원

                .

                .

                .

 

부처님의 발바닥만 바라보다 돌아 나왔다

 

 

 

 - 내소사에서 그가 하는 일은

                               
                                            최경선

 

잔망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그이도

풍월을 읊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소사 마당 연이 담긴 함지박 사이 은밀하게

티끌도 구르고 말 반지르르한 연꽃 같은 터전

너운너운히 걸쳐 둔 그 모양을 보니

그이 단청수가 되어있을지 모른다

이 가을 울긋불긋 날린 단풍잎 공양 때우고

비우는 것이 덕임을 몸소 행하느라

제 몸 야위어 가는 줄 모르고

색색 실 올올히 뽑아 날마다

줄레줄레 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멀고 먼 훗날

또 다른 전설이 되어 버릴지 모를

결코 엿보지 말아야 했던

 

 

 

- 점(點)

                                 이권형


어머니가 점지한 오른 손등 검은 점 하나 처음에는 바늘구멍에 불과 했지 손이 자라면서 흑진주가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때였어 너는 그 점이 복점이다 말해도 나는 믿지 않았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콩알만한 작은 점을 보아야 일이 손에 잡히고 집중이 되는 거야 신기하게도 모든 것은 머릿속이 아닌 그 곳에서 나왔어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었지 어머니는 시치미 뚝 떼고 계셨지만 나는 다 알았어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최근 인천 종합병원에서였어 어머니가 암을 선고 받던 날, 검은 점이 퇴색되면서 희미해지는 거야 무척 당황했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런데 며칠 후 암 선고는 오진이라는 거야 그 때 나는 보았지 그 전보다 더욱 또렷해진 흑진주를. 

 

 

- 기억을 재생하는 동안

                                           

                                                 신채린

 

 

바람도 가끔은 길을 잃을 테지 세상 곳곳 안 가본데 없건만 어느 순간 기억이 아득해지면서 지나온 길에 대한 기억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때 딴 세상에 온 듯 낯설음을 감출 수 없었을 테지 구름도 가끔은 길을 잃었을 테지 노선버스처럼 늘 다니던 길도 헷갈려 이쪽으로 가야할지 저쪽으로 가야할지 분간이 안 가 망연자실했을 테지

 

기억이 자꾸만 지워지고 있어 어제 한 일 기억 안 나 그제 한 일은 더욱 까마득해 방금 한 일은 뭐였지 커피 물을 올려놓고 빨래를 널고 있고 빨래를 널다 말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어 화분에 물을 주다말고 연속극을 보고 앉았고 연속극 보다말고 책을 읽고 있어 그러다 삐삐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서 아참 내가 커피를 마실 참이었지 아참 내가 빨래를 널던 중이었지 아참 내가 화분에 물을 주던 중이었지 아참, 아참, 하면서 하루가 가고 있어

 

기억을 재생하고 싶어 춘천행 완행열차를 탔어 바람이 되어 떠돌기로 했어 구름이 되어 무작정 흘러가 보기로 했어 흘러가다 보면 떠돌다 보면 생각날 거야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어디인지 생각날 거야 사랑하는 그대 얼굴이 그대 좋아하는 차향이 그대 애송하던 시가 기억날 거야 생생하게 아니 생경하게...

  

 

- 돌멩이의 꿈

 

                               최윤경   

      

온통 돌 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도

차갑게 식은 가슴도

뒤섞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모래알 속에 작은 돌멩이 하나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 오는 냉정한 말들  

과거를 따지고 있는 앙칼진 목소리

밀려왔다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파도 속에 휩쓸려 떠내려간 것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 몇 자

그 무엇도 이렇게 딱딱하진 않을 것이다

어느새 주머니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낯선 돌멩이 하나

더 넓고 환한 세상 꿈꾸며

꼼지락 거리고 있다

손이 시리다  

 

- 견고한 슬픔1

          -폐염전에서

                                         김경성

                                                        

갯바람이 차다

가슴으로 들어간 바람 등뼈 뚫고 달아나는 폐허를 보고 싶었다

온몸이 가시로 덮여 만져볼 수 없는

해당화 지고, 붉은 씨방 농익어 부활을 꿈꾼다

하루에 두 번씩 옷을 벗는 여자,

소금꽃 버금버금 너무 많이 쏟아내고 말았나

더이상 잉태할 수 없음에  흰 뼈마저 허물어지고

칼바람 불어와 뼛속을 후빈다

수문은 닫히고

뜨거운 햇볕이 닿아도 꽃 피워낼 수 없는

그녀의 몸,

문자나 어떤 기호도 남겨놓지 못하고

제 몸에 새겨져 있는 소금꽃 뿌리 찾고 있다

절여진 슬픔은 묽어지지 않는다

슬픔이 깊어지면 모든 생각이 수평으로 흘러가고

그리움도 깊어지면 어느 순간부터 고요해지는 것

수문이 닫힌 갯벌

살아서 꿈틀대는 몸을 가진 것들

뻘 속으로 들어간 후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함초마저 식물 표본이 되어버렸다

바람 불어와

그녀의 가슴을 핥고

갈대밭 들쑤셔놓아도

그녀는 더이상 옷을 입을 수 없다

벗어놓은 옷, 닫힌 水門에 걸려있다

 

 

 

 

 

   - 밤벌레

 

                                     윤은영

 

삶은 밤 가운데를 어금니로 뚝딱 반을 갈라 속을 혀로 훑어내다 보면 고소하고 달콤한 밤의 속살이 입 안에 와서 부서진다. 황홀한 기분으로 껍질 쪽쪽 빨다가 눈을 떠보면 홀딱 벗고 웅크린 밤벌레 시치미를 뗀다. 헉헉 소박맞은 밤톨이 되어 삐쭉 눈 흘기고 보면 그 사이 몸이 탱탱하게 잘 부풀었구나, 나쁜 놈. 그 길로 욕실로 들어가 옷을 들치고 몸 한 구석 파보았더니 그 속에서 오글거리던 무수한 밤벌레들 쏟아진다. 

 

 

   - 학원에서

 

                                     윤은영


원비 날짜 21일이 다가오는 초등학생 해성이에게 선불 납입을 해줄 부탁으로 봉투를 내민다.

그러면서 하는 말

“해성아, 월급봉투 나왔다.”

이 말은 부모님께 요청하는 돈 봉투임을 애써 감추려 재미로 가볍게 붙이는 말이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월급봉투라고 하며 주게 된 꼴로 그 봉투 속에 수강료로 들어오는 현금 중 일부가 내 생활이 되고 밥이 되고 따뜻한 물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도 우리 아이들을 시험에 나오는 객관식 문항으로 한 번 더 끼워 넣을 뿐, 좀처럼 땀이 나지 않는 돈이다.

 

 

   - 떡국

 

                                     윤은영 


설날 아침

시린 바퀴 호호 불어가며 굴린 버스는

두둥실 날아올라 해 한 바퀴를 돈 뒤

광혜원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딱딱하게 굳은 팔뚝만한 가래떡을

넉 달 만에 찾아 온 못난 딸이지만

기우는 마음처럼 비스듬히 썰어내

풋풋한 파로 새해를 끓입니다


최근 우리 자동차 정비 공업사의

어려운 경제와 줄어드는 일거리와 밀린 직원들 임금은

곳곳에 세워진 범퍼 잃은 폐차이며 아버지의 낡은 어깨이지만,


아버지가 끓인 새해 한 입 떠먹어 봅니다

아버지 손수 끓여낸 떡국 뽀얀 사골국물 몸 속속들이 스며들어

이 세상 뽀얗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가래떡처럼 쫄깃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포도를 먹으며

 

                            윤은영

 

포도는 따고 나서 익힌다는데

포도 안 익었다

시큼한 알갱이가 터진다

딴딴하게 힘을 주는 저 자줏빛 고집에

내가 당했다

모른 척 껍질까지 넣고

자근자근 씹어주는데 혀가 얼떨떨하다

습관처럼 냉장고에 넣으려다

화가 난 나는

초파리의 공격을 당하더라도

당당하게 밖으로 나와 익어가라고

상자에 있는 걸 모두 씻어 내놓는다


세상맛 좀 봐라

 

 

   - 행복 면허증 따러 가는곳

 

                                             김일용

 

용산가는 국철, 몸을 싣고
노량진 가는 버스 갈아타며
발걸음 채이는 새벽 공기
보장된다고 믿는 소박한 밥상을 위해
텅 비어 속 쓰린 위장 달랜다
쓸 곳 없는 지식은 닿기 힘든 곳에 앉아
무모하게 좇아가려는 사람들을 우롱하고
이름조차 생소한, 자격증들이 줄지어 서서
내일을 향해 꿈꾸는 열망들을 미로 속에 빠뜨린다
마이크가 우는 환청에 숨 막히는 공간,
우상처럼 뻗어대는 갈 곳 없는 손길
푸석거리는 얼굴들이 누렇게 떠다닌다 

 

 

- 까치집   

 

                           강애란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 엉성한 집

둥지 위에 걸터앉은 어린 까치

파닥이는 날갯짓이 위태롭다


저기서 홀로서길 기다리고 있는걸까

저기서 흔들리는 세상 바라보게 하는걸까

저렇게 바람에게 중심잡기를 배우게 하는걸까


새끼 혼자 서울을 지키고

지방 살이가 길어지는 날엔

흔들리는 어린 것들을

새들 나비들 작은 풀꽃들을

자꾸만 등에 업는다 발목이 아플 때까지

 

 

- 단풍               

 

                  김길순

 

보라 빛 하늘에

낙엽이 떨어지면서

계절을 재촉하고 있다

서산 자락에 해가 지듯이

 

인생길

속절없이 가고 오고

피아노 레슨을 하고

용마산 산행을 하며

시를 쓰는 동안

인생도 물이 들었다.

 

단풍 잎에 누워

가을 하늘 올려 보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사푼히 떨어지는 단풍

순간과 영원의 징표를본다.

 

 

 

- 제일 양장점            

 

                     김상숙

                 

한 땀 한 땀

양장, 본을 뜨고 있다

 

실밥 잇듯 주욱 들어선

제일시장 난전 모퉁이

낙타처럼 가슴이 빈약한 여자가

늦은 밤

꽃무늬 레이스 천에

또박또박

희망의 쵸크를 긋는다

 

자르고, 붙이고, 덧대고

캄캄한 좌판마다

하나

꽃이 핀다

가봉假縫 없이 자르고 박은

기성복들이 질주하는 세상

틈틈이 꽃의 행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기도 하는 그녀

시장 골목길에 모래바람 일면

박음질 끝에 더 푸르러지는 꽃나무들

마지막 단추 구멍 내다보면

낙타가 빠져나갈 바늘귀가 보인다

 

시집 한 권 묶으려고 나도

봉제선을 수없이

뜯었다 박는다

 

이 도시에서

낙타는

자주 길을 잃는다

사방이 길이다

 

 

 - 2070년 헤이리 카메라타는       

 

 

                                                            류승도

헤이리 깊숙한 언덕 중간쯤에 2007년도의 음악감상 카페 카메라타가 있다
몬드리안의 수평 수직 원색 평면구성을 생각게 하는 현대식 시멘트 건축물이다
저녁 8시 갓 지났는데, 늦가을의 어둠은 죽음처럼 깊다
카페 안은 사방 그림자 색이고, 음악은 더 폴링 리브즈 분위기의 엘피판 재즈이다
당신은 낙엽 쌓인 끝날 것 같지 않은 윤회의 길을 걷는 독신의 가슴을 긁고
1930년대 공연용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높은 천장에 너른 공간에는 테이블이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 있는데
산 사람 아닌 영혼이라야 차나 커피를 마시기에 적당하다
그림자 색에는 차보다는 커피향이 더 어울리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주인은 없는데 음악이 흐르고 차와 커피는 끓고 있다
사진을 하던 연인의 영혼이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아이를 잉태한 젊은 부부의 영혼이 아이의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룻밤을 조르던 청년과 여자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아직 생의 나이를 먹고 있음일까
혼자 구석의 벽 쪽에 앉았던 오십대, 여류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다
사십대쯤의 아주 편안한 남자와 여자가 일상과 여행과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편안하나 왠지 모를 설레임이 있다
모두 둘이고, 모두 닮았으며, 모든 소리는 낮게 전해진다
사랑이나 자유의 영혼이 아니라면 이 공간에 앉아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커피의 김이 오르는 벽 위에는 흰색바탕의 똑같은 원형시계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는데
시침과 분침이 돌고는 있으나 결코 8시에서 10시로 넘어가지는 않는다
역시 원형의 추는 시계 위의 그림자로 제자리를 왕복하고 있다
오늘 밤은 분명 2070년인데, 헤이리 카메라타는 2007년 11월 10(토)일의 저녁이다

 

  

- 발해(渤海)의 한 우물터에서            

 

                                        윤준경


그때 작았던 것들은 커지고 그때 컸던 나는 점점 작아져서 이제는 길길이 우거진 수풀 사이 물벌레의 서식처일 뿐인데, 내 위에 뜨던 달과 별, 스치던 바람과 나에게서 나르시스를 찾던 많은 소년과 소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고, 아직 샘물이 솟아올라 내가 우물이었음을 기억할 뿐인데, 다만 또렷한 것은 그때 드리운 많은 그림자들이 내 주위를 돌며 두런두런 이야기 한 일, 맑은 물이 찰랑거려 밤새 잠들지 못하던 내 귀에 분명, 지금 음흉한 칼질로 나를 파헤치는 탐욕스런 저 소리가 아닌, 퐁당퐁당 몸속으로 번져오던 두레박질 소리, 나의 파문을 비추던 선한 눈동자 그리고 언제나 하얀 옷을 입은, 장대한 기골을 가지고도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쓸쓸히 넘어가던 그들이 나의 이웃이었던 것을......., 모를 일이다 천년이 넘게 버려졌던 나를, 지금 미친 듯 고요한 음부에 손이 뻗쳐오는 것은....


- 문신 


                            윤준경


장미문신을 가진 여자가 있다
장미는 사철 그녀의 살에 피어
부드러운 가시로 시간을 밀어 낸다
눈물에도 웃고 있는 그녀의 장미

열어보면 나에게도 문신 하나 있다
운명을 따라 꽂힌 바늘 자국
붉은 피로 새겨 지울 수 없다
잠 속에서도 나를 감시하는

  

 

시간이 바람 속에서 졸고 있다       

 

                                           이경석

 
시간이 바람 속에서 졸고 있다

다 영근 풀씨들은 다 익은 언어에 업혀 있고

한 소식 닿은 만물들은 그간 써먹었던 이력서를 바람에

훌훌 던져 버리고 있다

이젠 이기심도 필요 없고 그래서 관이 안된 음식처럼

심심한 이야기를 모두 편지로 쓴다

수취인이 없어 읽는 이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가을은 형식처럼 편지를 쓰고 있다

백지와 같은 의미 없는 하얀 낱말이라도

길가에 서 있는 붉은 우체통에 밀봉한 편지를 넣고는

각인도 지워지는 무중력의 느낌으로

시간이 바람 속에서 졸고 있다

 

 

- 무덤에서 떡 먹기                       

                                                       장성혜

 

  하루가 무덤 속 같다면 나오세요. 어디로 갈지 방향 잡지 못하겠으면 중앙박물관으로 가세요.깨진 약속이나 삐걱거리는 식탁은 잊으세요. 지하도에서 떡 파는 할머니 만나면 망설이지 말바람떡을 사세요. 입구에 화살표가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떡이 든 가방을 메고 구석기시대로 가세요. 주먹도끼 보며 가방 속 팽팽한 랩을 찢으세요. 화살표는 경고 하겠죠. 무덤에 손대지 마세요. 떡 먹지 마세요. 못 본 척 사냥하는 장면 앞에서 짐승 속살 같은 쫄깃한 떡을 씹으세요.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 줄줄이 보일 거에요. 금방 신석기시대죠. 빗살무늬 문양을 본뜨는 아이가 쳐다보면, 얼른 하나 입속에 넣어주세요. 독무덤 곁에 연인들이 사랑을 굽고 있어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머지않아 그 사랑도 무덤이 될 테니요. 천천히 걷다 보면 무덤은 자꾸 커질 거에요. 화려한 껴묻거리 사이에 오래 머무르지는 마세요. 사라진 무덤 주인을 생각하다 목이 막힐지도 몰라요. 금관 앞에 실수로 떡을 떨어뜨려도 괜찮아요. 가방 속 떡이 남았으면, 한 바퀴 더 도셔도 좋아요.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프면, 무덤 속이 더 환히 보일 테니까요. 아침에 빠져나온 무덤이 생각날 지도 몰라요. 떡을 우물거리며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시간의 화살촉이 보일 거에요. 벽에 해와 달이 그려져 있을 거에요. 몇 조각 구름이 떠 있을 거에요. 무덤에서 무덤으로 가는 길이 희미하게 보일 거에요. 문득 출구에 선 당신이 남은 한 조각 떡처럼 보일지라도 슬퍼하진 마세요.

 

 

 

- 검침원                                 

 

                전건호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왔거든요

얼마나 피 뜨거운지

에돌아 온 길의 경사 어떠한지

엉성한 거푸집에서 삼킨 음식과 한숨도 점검합니다

환희 가득한 시절 은밀한 속삭임

천당과 지옥 넘나들던 순간

계량기엔 다 기록되어 있어요

생의 고비마다 쿵쿵 뛰던 심장박동

무모하게 역주행한 흔적도 점검합니다

과부하 걸린 생 까치발 뛰던 순간

다 검침해 청구할 겁니다

당신 생 저울질한다는 거

물론 완강히 거부하실 거예요

인정할 수 없다고

쓴 게 없다고 도리질 하겠죠

하지만 소용없어요

블랙박스 속 당신 지나온 길

선명하게 기록된 걸

난들 어쩌겠어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행사 도중에 누구의 말 한 마디가 내 눈물샘을 자극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구나! 어쩌면...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없었을 수도 있을 텐데..'

봄,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힘들었던 2008년의 하루하루 날들이 스쳐 지나면서

작년 이 맘 때 인사동 茶나무에서의 종강식(출판기념회)을 떠 올리고 있었습니다.

몹시 추웠던 날이었어요.

처음으로 어지럼증을 느끼면서 내 몸에 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으로 몸 떨던 날이었죠.

그 두려움은 현실로 다가 왔고

하고 싶은 말, 차마 내 뱉지 못하고 꾹꾹 억누르며

쓰고 싶은 글 차마 쓰지 못 했던 글들은 이내 응어리처럼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1년이었지요.

그리고 그 후 일 년이 지나, 오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는 일인가요.

 

시원문학회!

참으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생에 아름다운 획 하나 그어보겠다며 배움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과 함께

나 오늘도 이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으려니 행사 중간 즈음에 공연히 눈물이 나는 걸요.

나는 유난히도 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탓에 어느 자리를 가든 위험한 나는 기뻐도 슬퍼도 눈물부터 흐르는 나를 막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잘 참아내던 사람이 그만...

나의 詩 "나의 하루는 나비처럼 가벼워서"

를 낭송하기 전에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으니...

ㅎ~ 마이크 들고 울먹이는 사람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어디를 가나 앞에 나가서 눈물바람 일으키는 사람 한 사람씩 꼭 하나 있다고 그렇게 흉을 보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으니 생각만 해도 부끄럽고 고개를 들지 못 할 일입니다.

 

그래도 즐겁습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한 순간에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는 날이 있듯이

사뿐 날아오를 것만 같은 오늘 같은 날.

이 기쁨, 이 기분. 이 감정...

가라앉지 말아야지...요. 가라앉지 말아야지...요.

그래요, 위태로운 시간들을 무심한 듯 조용히 지나쳐버리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버거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듯이

나의 하루는 나비처럼 가벼워서 이렇게 좋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을...요.

어찌 아니 기쁘고 아닐 즐거울 수가 있는가 말이예요.

 

이제,

뱉어내고 싶어도 뱉어내지 못했던 말 말 마들을 맘껏 구토해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던 글 거침없이 써 내려 갈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길 위의 세상 1 > 문우들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참으로 오랜만에  (0) 2009.09.14
[스크랩] 눈부신 조우  (0) 2009.09.10
시원문학회  (0) 2008.10.21
소요문학   (0) 2008.10.21
두물머리, 함께 한 문우님들  (0) 2008.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