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시편
조용미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의 세계에 빛이 침입했다 사라지는 걸
우리는 하루라 부른다
빛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빛은 어둠에 속해 있다
어둠이 빛의 주인이니 것처럼 내 몸이 나의 주인이 되어버렸다
오생 헝겊이 내걸린 당집 근처,
새벽빛을 앞지르는 황도광처럼
까마귀들이 죽은 나뭇가지마다 가득
빛을 뿜으며 앉아 있다
병 깊은 몸이 한 올 한 올 구분해내는 빛은 대침처럼 머리에 와 박히고
물색을 두른 나무들은 모두
우두커니
희거나 검거나 붉었다
흑점이 움직일 때 둥글게 드러나는 코로나,
누워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책력을 한 장 한 장 더듬어보는 늦은 밤
더 이상 선과 악이 분명치 않다
<시집 : 감베옷을 입은 자화상 / 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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